▶ 후안 로드리게즈 카브리요
▶ ■ 잔 김의 길 따라 배우는 스패니시 <19>
현재 LA 인근의 카브리요(Cabrillo)라는 명칭은 토랜스 지역의 웨스턴과 크렌셔 사이에 있는 도로를 비롯해 샌피드로 항의 해양박물관, 샌디에고의 카브리요 내셔널 모뉴먼트(Cabrillo National Monument) 등 곳곳에 산재해 있다.
유럽인으로 처음으로 캘리포니아를 탐험한 사람이 바로 후안 로드리게즈 카브리요인데, 오늘은 당시 그의 탐사 기록을 추적해 보기로 하자.
1542년 9월22일 40대 초반의 그는 새로 건조된 함선 ‘샌살바도르’(San Salvador: 구원자라는 뜻), ‘빅토리아’ ‘샌미구엘’을 이끌고 최초로 캘리포니아 탐험에 도전하기 위해 멕시코의 태평양 연안인 지금의 멕시코 할리스코(Jalisco)주의 나비닫(Navidad: ‘크리스마스’라는 스패니시) 항구를 출발한다.
같은 해 9월28일 순조로운 항해로 하루에 15~20마일 항해를 하던 카브리요는 천연 요새로는 안성맞춤인 샌디에고 만을 발견하고는 샌미구엘이라고 이름 지었고, 닻을 내린 그는 인디언들과도 접촉을 시도했는데, 그 곳이 바로 지금의 샌디에고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포인트 로마 지역이었다.
10월6일 샌클레멘토와 샌타카탈리나에 도착했고, 다음날 샌피드로 항에 접근할 때는 현재의 팔로스버디스 언덕에서 자신들을 발견한 인디언들이 신호를 보내기 위해 불을 피워 연기를 날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바히아 드 휴모(연기 만)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북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던 중 갑자기 날씨가 사나워지더니 폭풍이 일기 시작했고, 방향을 잃은 함선들은 풍랑이 이끄는 대로 북가주의 러시안 리버 해안까지 올라갔다가 겨우 멈춰 설 수 있었다.
카브리요는 함선들을 재정비하기 위해 남행을 시도, 11월16일 바히아 드 로스 피노스(Bahia de los Pinos: ‘소나무 숲의 항만’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몬트레이시) 만까지 다시 내려왔다. 11월17일 이곳에 정박해 주위를 수색하는 동안에도 풍랑과 파도가 심해 배를 수리하기에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몰아 더 남쪽으로 이동해 11월30일 카탈리나 섬에 도착, 배를 수리했다.
12월24일 식수를 구하기 위해서 섬으로 들어간 부하들이 인디언들의 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카브리요는 다른 부하들과 함께 섬에 상륙하여 인디언들과 전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그는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중상을 입어 함대로 돌아왔다.
그는 부하에게 지휘권을 넘겨 북쪽으로 항해를 계속할 것을 지시했지만, 본인은 결국 1543년 1월3일 배 안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함대는 명령대로 항해를 계속해 지금의 오리건주 경계선까지 올라갔지만, 캘리포니아가 커다란 섬인지 대륙인지를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 9개월의 임무를 마치고 4월14일 출발지였던 나비닫으로 귀항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경계선이 형성됐는데, 만약 항해가 더 북쪽까지 이어졌다면 캘리포니아주는 더욱 긴 형태의 주가 됐을 것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