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옥
대학강사·수필가
“ …저는 소설 나부랭이는 안 읽어요. … “
“ … … “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 방송국에서 메모를 전해 받아, 한 청취자와 통화를 하던 중 들은 한 마디 ‘소설 나부랭이’.
시카고의 래디오 방송에서 내가 진행하는 ‘책 이야기’ 코너를 재미있게 듣고 있다며 본인도 책을 매우 좋아한다고 하면서 무심코 던진 그 한마디가 명치에 걸려 한동안 속이 답답한 것이 꼭 무엇에 체한 것 같았다.
나부랭이 소설들이 소설을 나부랭이로 만든 것이 답답하고, 좋은 소설을 접하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 답답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한국에 다녀온 친구를 만나고 나서 그 체증이 조금은 가셨었다.
친구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권했던 6권으로 된 3부작 번역소설 및 책을 여러 권 구입해 우편요금을 아끼려고 선박으로 미리 부쳤단다. 며칠 전에 드디어 책이 도착해 그 6권짜리 소설을 손에 잡고 며칠을 밤을 새다시피 하며 흠뻑 빠졌었다고 했다. 변명 같지만 그래서 연락도 늦어졌다고 했다.
우리는 팬 케익을 먹으며 그 소설에 다시 한 번 빠졌다. 커피 리필을 여러 번 받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소설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레스토랑에서는 점심 손님을 받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그렇고 그런 우리 생활에서 한 편의 소설만큼 감동과 재미, 그리고 세상 이치와 지혜를 가르쳐주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어려서는 동화책을 읽고, 학창시절에는 필독서로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닐까.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 이었다”고 했지만, 내게 감동과 가르침을 주는 건, 소설이 반은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입시준비로 밤을 새우며 공부하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여름방학 숙제로 명작소설을 읽었기에 그나마 ‘고3’ 이라는 사막에서 오아시스 하나를 마르지 않게 간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소설 나부랭이’가 불쑥불쑥 나를 괴롭히던 중, 마침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헤밍웨이의 사망 50주년이 되는 7월을 앞뒤로 그와 그의 작품을 기리는 기사가 신문과 잡지에 꽤 여럿 실렸었다. 5월 말 유럽행 아메리칸 에어라인 기내잡지에 실린 그의 최후 몇 년의 생활을 추적한 기사부터 시작해 모든 기사를 스크랩하면서, 그 청취자도 헤밍웨이를 읽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헤밍웨이의 작품 중 유난히 좋아하는 ‘노인과 바다’를 고3 때 여름방학 숙제로 처음 읽었는데, 그 후에도 여러 번 다시 읽고 오디오북으로도 여러 번 들으면서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의 강한 정신력과 굳은 의지에 큰 감동을 받았었고, 그 후에는 헤밍웨이의 간결한 문체가 나를 사로잡곤 했다.
산티아고 노인이 망망대해에서 상어 떼와 벌이는 사투를 상상하며, 그가 혼잣말로 하는 말을 들으며, 그의 세계에 자연스레 빠지게 되고, 느끼게 되고, 그러면서 노인과 소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패배하려고 태어나지는 않았지.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할 수는 없어” 라고 말로만 하지 않고 몸으로 보여주는 노인과 소통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소설의 힘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2009년 ‘영혼을 고양시켜주는 베스트 도서’에 뽑혔던 <청춘의 독서>에서 저자 유시민은 자신의 인생을 바꾼 책을 14 권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 4 권이 소설이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최인훈의 <광장>, 푸시킨의 <대위의 딸>,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우리도 잘 들여다보면 우리의 인생을 바꾼 소설이 한 편쯤은 꼭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선다. 나이가 들면서 나름대로의 책의 취향이 생기고, 선호하는 장르가 있게 마련이다. 물론 그래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을 한 묶음으로 엮어 ‘소설 나부랭이’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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