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미씨의‘감나무’를 읽고
남도 섬 마을인 나의 고향집에도 두 그루의 감나무가 있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 감나무는 할아버지 때 심은 것이 분명했다. 기와집 옆 꽤 넓은 마당에 우물이 있고 그리고 두 그루의 감나무는 돌담벼락을 등지고 서 있었다.
감나무 아래 공간은 내 어린 시절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였다. 나는 제기를 차다가도 우리 집 감나무를 말하며 우쭐대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해 부터 우리 집 감나무의 정체를 알고부터 감나무는 더 이상 자랑거리가 되지 못했다.
봄이 되면 김용미씨의 글처럼 조그마한 꽃병같이 생긴 감꽃은 어김없이 피고 그리고 감꽃 속에 감추듯 잉태되고 있는 새끼감들은 나에게 커다란 가을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하루도 수 없이 감나무에 달려가 하늘을 향해 어서 가을이여 오라하고 외치곤 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시작되면서부터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감들은 낙상하기 시작했고 무더움이 왔을 때는 두 그루의 감나무에는 잎만 무성할 뿐이었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해도 나의 바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감나무 밑에는 나의 어린 꿈을 무수히 짓이기는 잔해들 뿐이었다.
어린 나는 할아버지나, 아버지, 그리고 머슴(일꾼)까지도 가을에 아무런 열매를 만들어 주지 않는 감나무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에 끙끙댔지만 어린 나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교회당 담 넘어 초등학교 동창이던 창호네 감은 어린 아이의 머리만큼 큰 동우 감(어렸을 때 그렇게 불렸음)이 가지가 땅에 닿도록 주렁주렁 열린 것을 볼 때마다 아무것도 꿀릴 것이 없던 창호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우리 집 감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후 어린 나는 감이 한창 크기 시작하는 여름에 태풍이나 세차게 비바람을 기다리는 이상한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세차게 비바람이 부는 밤에는 이른 아침을 기다리며 잠을 설치고 있었다. 세찬 비바람으로 동네 동각(사무소) 뒷마당에 담 너머로 뻗친 한씨네의 감들이 무수히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잠 못 이루는 여름밤은 나만이 아니었다. 눈꺼풀을 그대로 달고 멋쩍어 하면서 우리들은 떨어진 감들을 줍느라 제 정신들이 아니었다. 수년에 걸처 고향에 가면 아직도 고향에 살고 있는 그 때 그 동무들은 어김없이 한씨네 감이야기를 하며 우리 모두 그 때 만큼은 개근생들이었다고 서로 웃는다.
지금은 50년이 더 지났지만 나는 감에 대한 소원을 원 없이 푼 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형님이 여수에서 유학(?)하고 있던 자취집이 열두 그루가 넘는 감나무가 있는 집이었다. 방학 때 한 가방 가득히 담아온 풋감들을 보리독에 묻어놓고 오랫동안 꺼내먹던 기억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어릴 당시 삼백호가 넘는 마을, 그래서 섬 전체 여섯 동네 가운데 큰 동네로 불리던 나의 고향마을에는 왠지 감나무들을 가진 집들은 손꼽을 정도였다. 섬의 새 찬 바람 때문에 조상들이 감나무 심기를 주저했는지 모를 일이다.
감나무에 대한 아쉬움을 해결하기 위해 우물가에 무화과 나무를 심기로 하고 이웃집에서 무화과 나뭇가지를 얻어 내 손수 심었다.
그러나 나는 고등학교부터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가서 생활하다보니 점점 감나무와 무화과나무는 방학 때만 만날 뿐이었다. 왕성하게 커진 무화과 나무는 우물물에 그늘을 드리우며 탐스런 무화과로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여름 고향에 왔을 때 어린 나에게 희망과 절망을 함께 안긴 두 그루의 감나무 자리에 쪽파와 배추들이 싱싱히 자라고 있었다.
삼십 년이 넘게 워싱턴 일원에서 살면서 아내 따라 한국 식품점에 가면 단감이 아닌 동우 감 앞에 어김없이 머뭇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잠시나마 어릴 적 고향 감나무를 떠오르게 한다. 친구 창호의 동우감이 생각나서 한 접시 사 가지고 오지만 그때 그 시절의 동우감은 아니었다. 이래저래 우리 집 감나무는 어릴 때부터 노인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 나의 깊은 아쉬움의 대상으로 남아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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