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성경에서 극적인 연애 결혼을 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라헬을 연애해서 7년 머슴살이도 며칠처럼 여겼고 다시 7년을 합치면 14년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청춘을 바쳤다. 그러나 숫총각의 동정을 연인 라헬에게 바치고자 기다려 왔는데 그 황홀한 첫 날밤을 치루고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옆에 누워있는 여인이 못생긴 언니 레아가 아닌가! 그 참담한 기분이라니!
라헬은 그 날 밤 어디에 감금되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을까? 아무리 아버지의 권위가 자식의 생사권을 쥐고 있는 족장 시대라 해도 피해자인 야곱과 라헬 두 연인에게 아버지 못지않게 얄미운 것은 언니 레아였을 것이다. 어찌 그렇게 음흉하게 동생 라헬을 속일 수가 있었을까? 수많은 밤 레아는 잠자리에서 동생 라헬이 사랑하는 야곱에 하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사랑은 소리가 나는 법,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말하게 되어있는 법이다. 레아 만큼 그들의 절절한 러브스토리를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러나 결혼식 날 동생에게 이 긴박한 상황에 대해 한마디 말없이 깜깜한 밤 야곱의 손길을 라헬인척 내숭을 떨며 받아들였다. 그 후 레아를 대하는 야곱의 느낌은 유쾌했을까? 순정의 사나이 야곱이 당시 전통을 따라 두 자매를 다 아내로 맞이 하기는 하였지만 야곱의 마음 속의 아내는 라헬이었다.
가끔 남편의 의무로 레아의 장막에 가긴 하였지만 레아가 남편의 사랑받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장인과 함께 첫 날밤 감쪽 같이 자기를 속인 음흉한 레아의 성품에 대해 야곱은 일생 동안 신뢰감을 갖기 어려운 상처가 있지 않았을까? 드디어 두 자매의 남편 쟁탈전으로 피곤한 야곱의 결혼 생활이 시작된다. 하루는 합환채 사건으로 다툼이 일어 났을 때 레아는 라헬에게 “네가 내 남편을 빠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며 그 것을 주는 댓가로 야곱을 하룻밤 자신의 장막에 들이도록 한다. 여기에서 자기 연민에만 빠져있는 레아의 모습이 엿보인다. 돈 밖에 모르는 매정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닮은 음흉한 언니에게 정작 신랑을 빼앗긴 여인은 라헬이 아닌가!
레아가 그들의 입장에서 좀 더 배려하였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그 녀도 야곱에게 더 사랑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야곱 가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라헬은 둘째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으로 죽는다. 베들레헴 길가에 그 녀를 묻은 야곱은 훗날 이집트에서 임종을 앞두고 라헬을 길가에 묻을 수 밖에 없었던 정황을 요셉에게 설명한다 (창 48:7).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조상들의 무덤에 묻히지 못한 것이 끝내 야곱의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레아는 사랑의 정적인 라헬이 죽었을 때 그 녀에 대한 질투의 마음도 무덤에 함께 묻었을까? 드디어 명실공히 그녀는 야곱 집의 당당한 안주인으로 남편을 독차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사랑도 독차지 하였을까? 나이들어서도 자기중심적인 레아의 좁은 시야는 그리 많이 바뀐 것 같지가 않다. 레아가 안력이 나쁘다는 표현은 그 녀의 외모 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어찌보면 시야가 좁은 사람, 자기 중심적인 생각의 틀에 갇혀 사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요셉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 형들의 미움 뒤에는 엄마 레아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 녀는 지난 날 라헬에 대한 질투에서 이제는 어린 요셉에 대한 남편의 편애를 불평하였을 것이다. 가정의 형제 우애는 엄마에게 달려있다. 요절한 동생 라헬을 대신해 요셉과 베냐민을 거두어 주고 엄마없는 어린 것들을 잘 돌봐 주라고 여섯 아들들에게 당부하면서 길렀다면 그 형제들이 요셉을 종으로 파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야곱이 요셉을 더 편애 하도록 한 책임의 일부는 안주인 레아에게도 있지 않을까 ?
성경은 요셉이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함께 있었다고 말한다 (창37:2) . 레아가 야곱집의 안주인으로서 너그러움과 지혜가 있는 여인이었다면 자기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며 매사에 불평하는 것을 들었을 때 (창 37장 4절) 옹졸한 형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좁은 마음을 보았어야 했다.
성경은 레아가 안력이 나쁘다는 말 외에 어떤 성품의 여인이라는 언급이 없고 단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아들을 많이 주셨다고만 언급한다. 라헬 역시 자식을 낳지 못해 속상해 할 때 그 녀도 불쌍히 여기셔서 요셉을 주셨다.
하나님은 이 여인도 저 여인도 불쌍히 여기셨다. 성경을 읽으며 나도 어쩔 수 없이 야곱처럼 라헬을 사랑하고 레아가 덜 예쁘게 보이는 편견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못난 레아도 아리따운 라헬도 다 불쌍한데 우리는 각자의 편견으로 사람을 본다.
(산호세 성결교회 교육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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