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천명관의 장편소설 ‘고래’를 읽은 것은 벌써 몇년 전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기존의 한국 소설들과는 다른 특이하면서도 매력적인 소설이라 언젠가 한번 글을 쓰고 싶었다. 소설 ‘고래’는 제 10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했고, 한국 문화예술 위원회 선정 우수문학도서로 꼽혔다. 그의 다른 작품으로는 단편소설집인 ‘유쾌한 하녀 마리사’와 장편소설 ‘고령의 가족’이 있는데, 나에게는 ‘고래’가 독특하고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장장 450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읽으면서도 지루한 줄 모르게 만드는 작가의 거침없는 입담과 그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야기 중간 중간에 마치 신파극의 변사처럼 ‘성급한 독자여, 조금만 더 들어 보시라’하며 추임새를 넣는 작가의 능청스러운 말투는 시끌벅적한 옛 장터의 ‘자~날이며 날마다 오는게 아닙니다. 애들은 가라’던 약장수가 떠올랐다.
그가 풀어 놓는 보따리에서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재미나게 펼쳐졌고, 이야기가 깊어 갈수록 빠져 들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었다. 박색의 국밥집 노파, 관능과 열정의 화신인 금복과 그녀의 자폐아 딸인 정신 박약아 춘희, 벙어리인 춘희와 이야기를 나누는 코끼리 점보, 생선장수와 순박한 일꾼 ‘걱정’, 칼잡이, 쌍둥이 자매, 교도소장과 트럭운전사 등 온갖 인간 군상과 죽어서도 이 세상을 떠도는 유령들……분명 글을 읽었는데 아라비안 나이트 ‘천일야화’를 들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긴 이야기와 작가의 엄청난 ‘구라’가 끝난 무렵에는 알 수 없는 먹먹함으로 가슴이 찡해지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나의 기억에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작가 천명관은 ‘총잡이’와 ‘북경반점’의 영화 각본을 쓴 작가인데,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들에는 영화적인 상상력과 인물들, 환타지적인 성격이 다분하며, ‘고래’는 민담과 설화, 신화적인 요소도 갖추고 있다. 이 작품은 ‘전통적 소설 학습이나 동시대의 소설에 빚진 게 없는 작가다’(소설가 은희경), ‘소설이 갈 수 있는 최대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어느 순간 소설의 영역을 훌쩍 넘어 또 다른 공간으로 들어갔다’ (문학평론가 신수정)는 문단의 평을 얻었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부두-평대-공장으로 나뉘며, 세상에 한을 품고 죽은 박색 노파, 그녀가 남긴 돈벼락을 맞은 금복과 딸 춘희가 중심축이 되고,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두 모녀를 향한 노파의 저주가 관통하는 한편의 복수극이라 볼 수 있다. 이 소설에는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 사랑과 고독, 인간의 욕망과 잡을 수 없는 꿈(고래), 희노애락, 흥망성쇠의 덧없음과 그 덧없음 속에서도 무언가를 갈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대서사시처럼 펼쳐진다.
소설은 마을 평대의 고래극장 방화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고 청춘을 보낸 후 나온 춘희가 페허가 된 벽돌공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하고, 오랜 세월 그녀 홀로 벽돌을 굽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생존과 죽음 사이 담긴 3 세대에 걸친 많은 이야기를 풀고 있다.
반백치에 백킬로도 넘는 거구로 한번도 사랑 받지 못한 그녀에게 여자로서의 사랑을 알게 해주고 떠난 남자인 트럭 운전사를 기다리며 그린 그림, 그리고 침묵과 고독 속에서 물과 흙과 불로 구워낸 그녀의 단단하고 아름다운 붉은 벽돌들, 말을 못하는 그녀가 오래 전 죽은 코끼리 친구 점보와의 세상 마지막 대화- ‘넌 어떻게 여기까지 온거지? 내가 전에 말했잖아. 보고 싶은 것들은 다시 만나게 된다고. 우린 어떻게 되는거지? 우린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하지만 두려워하지마.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가 나의 마음에 남는다.
인간 욕망과 흥망성쇠의 부질없음 속에서도 춘희가 갈망했던 참된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아주 단순한 것이 아니었을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다정함과 따뜻함, 그런 것들…… 작가는 재미있게 이야기 해주고는, 마지막은 우리를 한없이 슬프게 만든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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