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탓이겠지만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게 되는 때가 종종있다.
자랑같아 말하기 좀 그렇지만 내가 어렸을 때 모든 주위의 사람들이 나는 나중에 화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나는 혼자 속으로 작가가 되리라고 맘먹었었다. 돌아보니 나는 마치 두 남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일생을 맘 못잡아 헤메는 여자꼴이 되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정말 좋은 글을 접하면 밤잠을 못이루며 단어의 절묘한 선택, 촌철살인의 표현, 유려한 흐름을 되씹고 되씹으며 가슴 설레어 한다. 그러다 정작 펜을 잡으면 세상에 나처럼 글 못 쓰는 이는 둘도 없을 것같은 절망감에 쓰라려진다.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그림에 설레어 붓을 들고 한참 그리다보면 마음 먹은대로의 그림은 하나도 안나오고 그러다보면 한없는 비참함속에서 왜 이다지도 재주없는 이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욕심은 갖고 있는 걸까 하고 죽고싶기까지 하다.
오래 전, 해군기지였던 헌터스포인트가 화가들의 작업실이 되어 많은 화가들이 모여서 작업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집에서 너무 멀어 오래 망설였었다. 그래도 결국 그곳에 자리 잡게 되었는데 처음엔 주위의 모든 화가들이 너무도 잘나 보였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보니 나만 그림 그리는 것을 힘들어하는 게 아니라 다른 많은 화가들도 그림 그리느라 몸부림 치는 모습을 생생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좋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녹녹치 않은 일임을 절감하게 된다. 사람이 모든 면에서 타고난 그릇이 있듯이 모든 화가들도 그 그릇이 있는 것 같다. 미술사에 남을 만치 좋은 그림을 그리고픈 욕망을 갖자 않은 화가가 어디 있으랴. 아무리 머리속에 이미지가 생생해도 내 손끝을 타고 나와 주지 않는데야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어차피 나는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화가가 되리라는 야무진 꿈은 꾸지도 않았었다. 그저 내 방에 걸어놓고 나혼자 보고 또 보아도 그저 좋기만 한 그런 그림을 딱 한 점만 그려내면 나는 행복하리라고 생각하며 시작한 일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생각치도 않은 큰성공을 했다. 그런데도 그림을 그리다보면 늘 미흡하다. 자신에게 너무도 실망이 되어 아무 바람도 없이 어느날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동그라미는 어린아이가 제일 먼저 그리기 시작하는 형체이다. 대개는 사람을 뜻한다. 동그라미는 또 영원을 말하기도 한다. 화합과 융화의 심볼이기도 하고 하모니의 의미도 있다. 이건 나, 이건 너, 이건 앞집 아줌마, 이건 고마운 이, 이건 서운한 이, 동그라미는 조금씩 조금씩 캔바스를 채우고 그 나름대로 리듬감도, 깊이도 더해졌다. 그림을 그리며 어느 것 하나 돋보이지않는 작은 이들의 평화, 그 작은 이들의 연결고리, 그 작은 이들의 소중함, 그리고 그 작은 이들이 만들어 내는 커다란 사회라는 거대함, 한코 한 코가 이어져 만들어 지는 안전망같은 그물을 생각했다. 어렸을 때는 잘난 사람, 눈에 띄는 무언가를 이루어 낸 사람, 돈이 됐든 권력이 됐든 명예가 됐든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있고 더 힘이 있는 사람들만이 소중한 사람인줄 알았다. 동그라미로 커다란 캔바스를 채우며 나는 많은 것을 배운 것 같다. 아주 작고 평범한 한 삶이 그물을 그물되게 하는 아주 소중한 한 코라는 걸 자랑스레 인지하는 흡족한 자족.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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