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에세이수요일은 저녁까지 강의가 있는 날이어서 10시 경에야 집에 오기 때문에 몸이 파김치다. 마구 마구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혹시 급한 이메일이 들어와 있나 체크하려고 메일함을 열어 훑어보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선배한테서 온 이메일의 제목이 오도막이 나를 응시했다.
"애인 있어요" 오잉~! 이게 뭔 말! 급히 클릭을 해서 열어보았다.
"60이 넘어서 내가 이렇게 사랑에 빠지게 될 줄은 몰랐다..... 너를 내 품에 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인다. 지금은 나 혼자만의 짝사랑이구나. ...... 너는 내 가슴 속의 잔재한 어두움을 걷어내고 따뜻하고 화사한 빛을 비춘다. 샘이 솟아오르는 듯한 기쁨을 나에게 퍼주고 있다. 너로 인해 하루 종일 내 얼굴에 미소가 그치지 않는다........"
첨부파일로 들어온 세 장의 아가 사진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인생은 참 아름답다 라는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내리사랑.
몸은 파김치인데 잠은 달아나고 아스라이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외할머니는 나를 ‘우리 큰 애’라고 부르셨는데, 외할머니에게 ‘우리 큰 애’는 뭐든지 최고였다. 동생과 싸움이라도 하면 외할머니는 "요년, 누가 언니한테 대들고 그래?" 하며 무조건 ‘우리 큰 애’편을 드셨다. 애인 중에도 첫 애인이 역시 으뜸인 것이다.
외할머니는 구두쇠 외할아버지 눈을 피해 열무며, 자두 등을 광주리에 이고 새벽에 십리 길을 걸어 장에 나가 팔아 고쟁이 주머니에 꼬깃꼬깃 감추어두었다가 내 손에 거금을 쥐어주시곤 했다. "엄마한테는 말하지 말라"라는 달콤한 비밀지령과 함께. 나도 외할머니의 애인이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모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애인이야기가 시작되면 겸손한 인격도, 과묵하고 무뚝뚝한 성격도, 상대방과의 친분관계도 상관없이 남살스러운 언행이 마구 쏟아진다. "말도 못하게 이뻐요" "미스 뉴욕감이예요" "대통령 감이예요" "만지고 싶어서 죽겠어요" "내 자식은 이렇게 이뻤던 기억이 없는데..." "3살짜리가 벌써 글을 읽어요" 등의 팔불출 언행이 태연하게, 끝도 없이 이어진다. 아마 자식자랑을 그렇게 하면 꼴 보기 싫어서 얼른 자리를 뜨던지 대화를 돌리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애인자랑을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참 예쁘고 사랑스럽다.
며칠 전에는 엄마가 전화통화 중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 얘, 오늘 미스 윤을 만났다. H 마트에서. 왜, 예전에 느이 집에서 살림해주던 아가씨 말이다. 애들 안부를 묻길래 큰애는 유명한 의사고, 작은애는 최고변호사가 됐다고 말해줬더니 좋아하더라."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우리 엄마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렇게 마구 뻥튀기를 해서 애인자랑을 하신다. 이제 겨우 전문의 수련 과정을 끝낸 손녀는 갑자기 유명한 의사로, 일 년 차 변호사 손자는 최고변호사로 뻥 튀겨져 둔갑이 되어 나온다.
선배의 "애인 있어요" 이메일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너를 오래 안아주려고 아령으로 팔 힘도 키우고 있다." 아, 이쯤 되면 정말 못 말리는 애인사랑이다. "쬐꼬만 게 글쎄 벌써 가방을 메고 학교를 가"라고 환하게 웃으며 애인의 근황을 알려주던 배미순시인은 그 애인이 태어났을 때의 환희를 ‘너에게’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네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야/어느 날,/ 은빛 거대한 물결처럼/ 내게로 와 안겼을 때/세상 모든 아름다움/ 네 이름 위에 빛났었지/ 그래, 넌/ 이 지구상의/ 가장 뜨거운 생명의 꽃,/ 신비로운/ 어느 별의 승화/ 사랑 없이는 차마 바라볼 수 없는/ 또 하나의 희망/ 한 아름의 영모.
이영옥
대학 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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