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50대를 고비로 60, 70, 하향곡선을 긋는다. 인간 수명이 아무리 길어져도 여전히 50세가 인체의 분수령이라는 의미다. 예컨대 목이 마른 갈증도 50대를 넘어서면 줄어들고 모든 관절의 리듬이나 시력도 눈에 띄게 둔화된다. 정작 자신은 그런 현상에 대해 눈치를 채지 못하지만 몸이 그렇게 말하기 시작할 때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세월이 가면 노화현상이라는 열차를 타게 되고 지천명이니 이순이니, 매듭을 지날 때마다 가는 세월의 변화를 가슴에 담아야 할 일이다.
겨울이 길었어도 어김없이 봄은 왔다. 무엇이 세월이 주는 흔적을 온전히 막으랴만 거울 앞에 서보면 겨울과 봄이 다름을 느낀다. 방안의 풍경은 겨울이나 봄이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봄이 오는 창문 옆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겨울보다 한결 달라진 얼굴을 본다.
박혜란님의 “늙는 게 뭐 그리 대수냐!”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그때 50대 중반인 가정주부였는데 사실은 명문대 출신에 기자 경력의 커리어 우먼이다. 그런 그가 불과 2년 동안 겪은 일을 담담하게 토로했는데, 그 고통의 시작은 남편의 사업 실패와 큰동서의 죽음이었다. 그런 슬픔의 와중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친정 엄마가 돌아가셨고 이어서 중년 여자의 자존심을 꺾어버리듯 자궁을 다 들어내야 하는 아픔이 이어졌다.
그는 말했다. 남에게나 찾아가는 것으로 알았던 슬픔과 괴로움이 자신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신분이나 경력 따위를 아랑곳 하지 않고 세월이라는 시간들 속에 고통과 아픔은 자신을 밟고 지나가는 바퀴들이었으며 그 바퀴가 지나갈 때마다 삶은 늙어가고 있다는 진리를 고백했다. 그런 뜻으로 본다면 늙는 것만으로 한탄하는 것은 사치일지 모른다. 늙는 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삶에는 온갖 애환과 아픔이 더 짙게 무늬를 이루고, 그리고 간간이 가벼운 즐거움이나 기쁨의 조각들이 그 사이에 끼어들 뿐이다. 결국 삶 자체가 고통의 바퀴를 굴리며 올이 뜯어지듯 낡아가는 것인데 그 나이테에 집착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그때만 해도 이 나라에는 어떤 자존심, 우월감, 그리고 많은 것들로부터 조금쯤 떨어져 있는 고고함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세련미, 그리고 당황스럽기까지 했던 개인주의나 무관심 같은 것들 때문에 조금은 어색했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런 문명에 빠져드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러나 이제 미국은 더 이상 그때의 미국이 아니다. 세월이라는 칼날 앞에 깎이면서 더 감출 것 없는 늙은 나라로 변모된 모습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아메리카만의 변모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노화는 내가 지닌 늙음이 만든 당연한 착각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진부한 삶의 현장에서 나는 문득 봄을 만지고 있었다. 엊그제 한 지인으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았다. 나는 자이언트에 들려 디저트로 먹을 케이크를 사가려고 베이커리 코너에 있었는데 순간 저쪽에서 막 몽우리를 드러낸 튤립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작은 화분을 사들고 나오면서 지금까지 아내에게도 자식들에게도, 그리고 가까운 이웃을 위해서도 변변한 꽃 한 송이를 사거나 보내지 못했던 무딘 신경을 발견했다.
나는 이제야 눈을 뜬 셈이다. 황혼열차를 타고 가는 지금 창밖으로 흐르는 꽃과 들과 그리고 붉게 타는 노을을 목격한 것이다. 늙는 게 뭐 그리 특별한 일이냐고 말은 하면서도 우리는 걸핏하면 세월 앞에서 유세를 떠는지 모를 일이다. 창문을 여니 문득 봄 내음이 세월의 관절 사이로 스며드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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