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를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적도의 이글거리는 태양 밑에 아직도 열대림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보르네오섬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갈 때마다 무척 힘들어 선뜻 나서게 되지는 않았지만, 나를 찾는 까만 눈망울들을 잊을 수 없어 뜻있는 분들과 다시 나섰다.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고, 자동차로, 다시 여섯 명이 타는 경비행기로 이동, 대략 이틀이나 걸려 정글마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지구의 끝에 온 느낌이었다. 전기, 전화, TV, 인터넷과 각종 문명시설이 전혀 없는 곳의 불편함도 있었지만 순박한 주민들을 돌보며 지내니 보람되고 기뻤다.
칠흑 같은 밤하늘의 총총한 별빛 밑에서 들려오는 정글 속의 풀벌레 합창소리는 아늑한 고향의 소리였다. 정확하게 새벽을 깨우는 닭의 울음소리는 짧은 하루를 재촉하였다. 우리 일행은 의료진료, 치과치료 그리고 필요에 따라 안경과 선글라스를 나누어주는 일을 하였다. 선글라스는 열대의 자외선 때문에 생기는 백내장을 막아주는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선물로 가져다 준 옷을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정글마을을 돌아다니는 주민들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하였다.
또 우리는 보르네오섬 서부를 가로지르는 카푸아스강을 따라 올라갔다. 길이가 1,100km가 넘는 무척이나 구불구불한 사행천이었는데, 황토와 열대림이 썩은 검은 색이 합쳐진 갈색의 강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이 강을 따라 형성된 많은 수상마을 중 한 곳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주민들은 이 거대한 강을 생명줄로 삼아 밥도 짓고, 빨래, 목욕도 하고, 바로 옆에서 뒷간 처리까지 하며 살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주민들에게 수인성 질환이 없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이 곧게 흐르는 강물보다 생명력이 왕성하고, 정화작용도 잘 되어 물이 깨끗하다고 한다. 서둘러 앞서 가는 사람보다 천천히 돌아가는 사람이 더욱 여유가 있고 건강한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그 강물에서 하루에도 두 번씩이나 목욕을 하지만 우리는 용기가 없어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딱딱한 나무판대기의 수상가옥에서 새우잠을 자며 지냈지만 그들과 보낸 시간은 너무도 즐거웠다. 그곳의 많은 환자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척 제한되었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 잡아온 야생돼지 고기와 토막 내 튀긴 뱀 고기를 같이 먹으면서 짧은 일정을 아쉬워해야만 했다.
배를 타고 카푸아스강을 다시 내려오며 강가의 수상가옥을 보니 우리가 가난하고 병들었을 때 우리를 도와준 외국 선교사들에 늘 감사해야 한다던 부모님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인도네시아에 있는 동안 나의 생명의 강이셨던 어머님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내가 돌아온 일주일 만에 어머님은 사랑 그득한 눈으로 나를 한참 쳐다보시더니,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마치셨다. 절대자의 명령을 받들어 심부름 나온 죽음이 모는 흰 마차를 타고 하늘나라로 평안히 가신 것이다.
어머님은 고통 없는 곳으로 가셨지만, 나는 어머님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저려오는 가슴을 친다. 의사인 아들이 어머님을 조금이라도 더 사실 수 있도록 해드리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병이 발견된 후 어머님을 우리 집으로 모셨고, 어머니께서는 함께 있어 행복하다고 하셨던 말씀이 나에게는 위로가 된다. 나팔꽃에 날아와 꿀을 빨아 먹는 벌새를 보고 너무나 반가워하셨던 어머니, 아직도 벌새는 꽃에 날아와 날갯짓을 하는데 반겨줄 어머님은 안 계신다.
"어디에 계시는지 사랑으로 흘러 우리에겐 고향의 강이 되는 푸른 어머니. (중략) 당신의 고통 속에 생명을 받아 이만큼 자라온 날들을 깊이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무례함을 용서 하십시오. (중략) 아름답게 열려 있는 사랑을 하고 싶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기억을 묻고 우리도 이제는 어머니처럼 살아 있는 강이 되겠습니다. 목마른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푸른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이해인 수녀>
김홍식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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