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쓰나미 희생자가 25,000명을 넘어섰다. 사망자는 9,500명, 실종자는 16,000명이다. 이런 경우 실종자는 거의 사망자 안에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이번 재난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단지 죽은 그 사람 하나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그가 맺어온 수많은 관계들에 깊은 상처를 가져다준다. 특히 재난으로 인한 죽음은, 재난 자체의 현실적인 고통에다 별도의 정신적 상처까지 얹어주는 격이 되어 관계자들에게는 고통의 배가현상을 경험케 한다.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을 잃은 남은 가족들이 경험할 고통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 기회에 죽음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특별히 기독교는 인간의 죽음을 ‘영원한 끝’이 아닌 ‘새로운 영원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믿는 목사이자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문제를 이럴 때에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다. 먼저 이와 관련해 나의 작은 경험 하나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미 동부의 한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할 때 일이다. 어느 주일예배 도중이었다. 그때 아들 성은이는 갓 세 살을 넘었다. 엄마는 유아실에 아이와 함께 TV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성은이는 짜증내며 심하게 울어댔다.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누군가가 아들에게 알사탕 하나를 주었다. 아이는 냉큼 받아 입에 물며 계속 울었다. 그런데 울음 딸꾹질이 사탕을 자동으로 삼키게 했고 사탕은 그만 목 중간에 걸리고 말았다.
마침 나는 교회 복도에 있었다. 내 귀에 익숙한 목소리의 비명이 들려왔다. 맞다, 아내의 비명이다, 뭔가 일이 벌어졌구나. 본능적으로 유아실로 달려갔다. 방 복판에 한 아이가 눈이 뒤집혀 죽은 듯이 누워있는데 아들 성은이었다. 1분 이상은 지났을까. 아인 계속 숨이 멎은 상태였다. 아내와 난 별짓을 다했다. 다행히 사탕은 목을 통과했다. 배로 넘어갔다. 아이의 숨이 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으면 아이의 뇌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는 말에 우리는 곧바로 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다. 앰블런스를 타고 가면서도 아이는 멍한 채 앉아있어 정말 얘가 이상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마침 병원 휴게실 TV에 돌고래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아들이 그걸 보고 외친다. “엄마, 돌고래…” 그 말 한 마디에 우리는 안심하게 되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모리 교수는 죽음을 담담한 표정 속에서 긍정적으로 맞이한 사람 중에 하나다. 예쁜 글쓰기로 유명한 미치 엘봄이 그런 그(자기 스승)를 만나면서 느꼈던 바를 책으로 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 그것이다. 한 문장 한 문장 다 좋으나, 모리가 ‘나이트 라인’(미 ABC 방송사가 매일 심야에 진행하는 취재 방송) 진행자인 테드 카플에게 한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너무 빨리 떠나지 말라. 하지만 너무 늦도록 매달려 있지도 말라.”
너무 빨리 떠나지 않아야 하는 건 죽음이 지금은 당장 끊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관계’까지도 단숨에 끊어버리는 매정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아들이 죽었다면 나는 그 매정함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목사라지만 죽음을 환영하는 믿음을 갖는 데까지는 그 사건으로 인해 앞으로도 너무나 많은 공을 들어야 할 판이었다. 내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죽음을 통해 가족과 이별하는 자들은 대부분 죽음이 주는 이런 매정함의 희생자들이다. 내 주변에도 이런 가족들이 실제로 있으며 나는 그들의 고통을 지금도 목격하고 있다.
반면 너무 늦도록 매달려 있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운명성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피하기 힘든 인생 주제라는 뜻이다.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내 앞에 더 성큼 다가서는 게 죽음이다. 그러므로 너무 늦도록 매달리는 것은 내 인생살이 중 또 하나의 성가신 일이 될 수 있다.
어쨌든 이 아포리즘은 모리가 자신의 임종을 목전에 두고 우리에게 던져준 명쾌한 ‘죽음’ 해석학이다. 이것이 명쾌한 이유는 죽음에 대한 그의 적절한 중용적 자세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중용적 해석 위에 상큼한 양념 하나를 더 얹어야 한다. 그것은 ‘믿음’이라는 양념이다. 죽음의 현실성에 대한 믿음이며, 죽음 이후의 내세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며, 또 그러기에 이 땅의 삶(고통을 포함한)은 충분히 살 의미가 있는 거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빨리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하고, 동시에 그래서 너무 매달려 있지 않아야 한다. 믿음만이 이 중용을 더 멋있게 승화시킬 수 있는 장치다. 신자의 삶은 이처럼 이런 믿음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다. 죽음, 그것은 우리 인생의 친근하면서도 거룩한 동반자다. 믿음이라는 전제 속에서…
(새크라멘토 수도장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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