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차할 역은 이별 이별역입니다/내리실 분은/잊으신 미련이 없는지/다시 한번 확인하시고/내리십시오/계속해서/사랑역으로 가실 분도/이번 역에서/기다림행 열차로 갈아 타십시오/추억행 열차는/손님들의 편의를 위해/당분간 운행하지 않습니다’ (이별역-원태연)
시는 이별역에 대한 풍경을 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가슴 아픔이나 눈물이 보이질 않는다. 이번 정차할 역에 잊고 내리는게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라고 친절하지만 무미 건조한 목소리로 알려준다. 행복행 열차인 줄 알았지만, 미움과 불행의 여러 정거장을 지나 어느 저무는 날 낯설고도 쓸쓸한 이별역에서 혼자 내리기도 하고, 모든 희망들을 놓아 버린 체 마지막 절망행 열차에 몸을 실었는데 행복역에 닿기도 한다.
어느 싯귀처럼, 빛인줄 알고 찾아 왔는데 컴컴한 동굴이기도 하고, 양지 쪽으로 걸어 나왔더니 음지 고드름 곁이거나, 바다를 향해 걷던 맨발은 어느덧 저물녘 깊은 산 속에 들어 서기도 한다. 길의 끝은 어디인지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때때로 혹은 연속적으로 부딪치는 삶의 배반과 모순, 부조리들을, 세월을 그래도 지긋이 견디며 굴러 가야 한다. 차창 밖에 흐르는 순간 순간의 풍경들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지나가는 간이역에서 낯선 사람들과 잠깐씩 만나고 헤어지고 스쳐 지나면서 말이다.
이십 여년 동안 함께 했던 사람들이 헤어졌다. 더 이상 불행하고 싶지 않아 헤어진다 했다. 이별역에 내리면서 다시 한번 확인해도 잊고 내리는 미련 없고, 사랑역으로 가지 않을테니 기다림행 열차로 갈아 타지 않을 거라 한다. 이별역에는 내리는 사람들의 편의을 위해 다행스럽게도 추억행 열차는 당분간 운행하지 않는다. 온갖 추억과 회한이 묻어 있는 텅 빈 집에 그녀를 혼자 놔 두고 나오는 밤길은 나의 마음도 스산했다. 누군가와 함께 했던 그 기나긴 시간들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지만, 결국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로 매듭 지어졌다.
얼마 전에도 나는 또 다른 지인 한 사람을 그렇게 타주로 떠나 보냈다.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내내 마음 서럽고도 추웠던 그녀가 혼자서도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라며 작별 인사를 했던 그 날은 그녀의 마음을 보여주듯, 차가운 바람이 불고 겨울비가 추적 추적 내렸다.
점점 멀어져 가는 사람을 향해 다시 돌아 오라 소리쳐도 그 소리가 닿지 않게 마음이 너무 멀리 가 버렸을 것이다. 가슴에 아물지 않는 크고 작은 생채기가 너무 많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서랍 깊숙히 넣어 둔 은밀한 연애편지가 있을테고, 그리움과 희망의 빛들을 품고 있었던 찬란히 눈 부셨던 젊은 날들이, 다른 모든 길을 끊어 놓은 둘 만의 고립 속에서 황홀해 했던 나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사랑은 그들의 마음과 삶의 많은 것들을 무너뜨렸을 지언정……
뒷마당 커다란 자두나무에 하얀 꽃이 환하게 피었다. 며칠 전 추운 아침, 나무 테라스 위에 하얗게 내린 눈서리를 보고 나는 자두나무 꽃잎이 바닥에 온통 떨어진 줄 알았다. 그리고 흰 꽃을 피운 자두나무를 올려다 본 순간, 나무 가지에 눈꽃이 피어 있는 줄 알았다. 겨울과 봄이 한 자리에 함께 있었다. 햇볕이 나자 서리는 금세 녹았지만, 내 마음에는 흰 자두꽃과 눈꽃이 그 날 하루 종일 같이 피어 있었다.
가끔씩 차가운 바람이 불지만, 환한 등불을 밝힌 것 처럼 꽃들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봄날, 나는 그렇게 내 생의 어느 지점 함께 웃고 울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누군가를 떠나 보낸다. 단촐하게 짐을 꾸리고 낯선 이별역에 혼자 쓸쓸히 내리는 그녀들의 생에 추운 겨울날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어서 오기를……이제는 행복하길, 혼자서도 꿋꿋하길, 매일 매일 밥 잘 챙겨 먹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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