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었다. 매해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신인상’ 이 없다. 동일하게 ‘아카데미 시상식’이라는 이름을 갖는 타 국가의 영화제에는 신인상이 존재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미국 아카데미상을 받을 수 있는 후보로 거론되는 배우들 중, 실제 갓 연기를 시작한 신인이 없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이제 막 스크린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소위 신인들의 뒤를 캐다보면, 거의 예외 없이 무명의 연극배우나 드라마 단역 배우 등의 타이틀을 발견하게 된다. 신인상을 주지 않겠다는 미국 아카데미만의 이 독특한 고집은, 어쩌면 표면 위로 쉽게 드러날 수 없는 배우들의 오랜 노력과 시간에 대한 최선의 예우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인재를 바라보는 이 진지한 시각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명실 공히 세계 최고의 영화제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조심스레 하게 된다.
몇 해 전 친구와 함께 대형 서점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 ‘몇 살 때 꼭 해야 할 몇 가지’라는 종류의 책을 쭉 찾아본 적이 있다. 물론 재미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리스트가 점점 길어지자 처음 같은 재미는 없었다. 세상엔 때에 맞춰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고, 그 중 참 많은 일들은 여태 시작도 못했으며, 어떤 일들은 이미 너무 늦어 시도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짧은 시간 동안 결국 나에게 남는 것은 후회와 불안이었고,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불만뿐이었다.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세상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내가 잘하지도 않던 것들을 찾아 시도하려는 생각이, 되레 내가 당시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상만 줄줄이 낳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부정적인 감상만 가지기에는 나에겐 너무나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온 것들이 있었다. 당당하게 이렇다 할 결과를 말할 수는 있는 단계는 아니었지만, 나 나름대로 꿈을 꽃피우기 위한 기초적이고 반복적인 노력을 하던 중이었고, 그간의 내 시간에 어느 정도 떳떳했다. 아마도 차곡차곡 쌓여진 노력의 시간이 언젠가는 가져다줄 나름의 상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참 많은 신인상들이 있다. 주목할 만한 새로운 인물이 떠오르면 세상은 강하고 빠르게 열광한다. 하지만 그 속도만큼 또 쉽게 잊혀 진다. 과연 날마다 또 다른 새로움을 원하는 이 변덕스러운 세상의 평가에 한번 뿐인 인생을 걸어야할까.
오늘날처럼 평가가 난무하는 때일수록 더욱 ‘집중’이 중요해진다.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다는 의미이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안다면 우리는 충분히 필요한 노력을 하고 또 인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하는 배우의 작품은 그 당시가 아니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재조명을 받게 된다. 매해 새로운 수상자들이 생겨도, 이미 시상식 자체가 영화사라는 역사가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회자된다. 결국 개개인의 치열함과 노련함이 기억할만한 역사를 완성하는 셈이다.
우리는 결과에 대한 평가에 익숙하다. 그리고 이런 단편적인 평가에 매몰되어, 그 결과를 만들어낸 시간에는 마땅한 관심을 쏟지 못할 때가 많다. 괴테는 주어진 시간에 대한 충실이 곧 행복이라고 했다. 충실함으로 쌓여가는 나의 행복이, 가까운 미래에 그 결과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행복으로까지 번져가는 기대를 해본다.
노유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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