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만취한 아버지가 구두 발로 온 집안을 휘 젖고 다니시며 잠자는 우리 머리위로 안방 장롱의 전신 거울이 요란한 소음을 내며 깨어지던 공포의 밤, 겁에 질린 우리 오남매에게 구세주 같은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난장판이 된 집안을 사랑방 문을 닫은 채 내다보지도 않으시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무개 네 이놈! 조용히 하지 못할까! " 하며 막내 아들을 호통하시는 힘없는 팔순 할아버지의 호령에는 신기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고요한 평화가 집안에 찾아 오고 아버지는 아무 소리 못하시고 잠이 드셨습니다. 얼음이 꽁꽁 어는 겨울 아침, 새로 해드린 솜 바지 저고리와 이부자리를 척척하게 적셔 놓으시고 민망해 하시던 오줌싸개 할아버지에게 우리 오 남매는 아침마다 잠이 덜 깬 부시시한 눈을 비비며 큰절을 하며 문안을 드렸습니다. 아버지의 엄명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월급날이면 아버지는 큰절을 하며 할아버지께 하얀 용돈 봉투를 제일 먼저 건네드렸습니다.
그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우리 집에는 더 이상 아버지의 성난 마차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제어장치가 없어졌습니다. 그 때가 우리 가족에게는 최악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학부를 마치신 훌륭한 박사 교장 선생님 이셨지만 술만 취하시면 이렇게 고장 선생님이 되시곤 하셨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당뇨와 파킨슨 병으로 오래 고생하신 우리 아버지는 참 복이 많은 노인이셨습니다.
젊어서 예수쟁이라고 핍박 받던 어머니는 그 많은 상처들을 가슴에 두지 않고 노년의 병든 남편을 극진히 섬겨 드렸습니다. 매 맞고 자란 두 아들들도 세상에 보기 드문 효자들입니다.
남편도 참 속이 좋은 사람입니다. 오래 만에 방문한 처가에서 ‘알코올과의 전쟁’이 벌어진 날이면 (우리에게는 익숙한 밤이지만) 주정이 심한 장인을 점잖게 만류하다가 셔쓰가 찢기고 거친 욕을 먹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섭섭함으로 가슴에 담아 두었지만 그는 기억에 없나 봅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병환이 오래 되자 엄마와 남동생을 도우려고 자청해서 모셔와 돌봐드렸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면 먼저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살펴보고 아버지가 실수로 배설해놓은 냄새 나는 큰 일의 뒷처리를 혼자서 다하고 땀을 흘리며 목욕을 깨끗이 시켜드린 후 침대에 눕혀 드렸습니다.
나는 남편의 그런 진심 어린 태도가 너무 고마워 고백했습니다. "당신 늙으면 내가 꼭 은혜 값을께요"
우리 아버지는 사위에게 존경 받을 만한 인격을 보이지 못한 것을 딸인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만 가시 돋친 말 한마디 없이 그냥 내 아버지이기 때문에 존중해 주는 그 마음이 눈물 나게 감사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내가 지나치리만큼 아빠의 권위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 자신이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고 반항심으로 얼룩진 십대를 보낸 것이 너무 싫어서 내 아이들에게 존경할 수 있는 아버지 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또한, 우리 아버지님이 비록 거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아버지의 권위에 대해서만은 순종했던 그 모습을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도, 남편의 권위도, 스승의 권위도…… 권위라는 단어 조차 생소하게 느껴지는 시대입니다.
어떤 면에서 진실한 크리스천이라고 자처한 나보다 불신자인 우리 아버지지가 “힘없는 권위”에도 순종할 줄 아는 마지막 세대의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권위! 왠지 오래된 괘짝에 집어넣어 둔 골동품처럼 취급 받으며 쾌쾌묵은 단어가 될 그 날이 멀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마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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