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만화를 보는 재미에 아버지께서 보시던 아침신문을 기다렸던 추억이 있다.
“왈순아지매” 이었는지 짧은 몇 커트의 그림과 대화에 날카로운 시사성과 유모어가 함축된 만화의 매력에 성인이 된 후에도 신문을 펼치면 만화부터 보았다.
읍 단위인 우리 동네에 처음으로 만화방이 생겼다.
이웃인 만화가게 아저씨는 사고로 두 팔을 잃으신 분이었다. 이웃도 도울 겸 만화가 상상력을 풍부하게 한다는 이점을 생각해서 아버지는 내게 만화방 출입을 허락했다.
그런데 그 날 아버지의 결정적인 실수는 내게 최초의 외상거래를 허락하신 것이었다.
가게 아저씨에게 월급날 한꺼번에 계산할 테니 언제든지 만화를 보게 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그 다음 달 월급날 즉시 취소 되었다.한달 동안 내가 본 만화의 비용이 당시 중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의 월급에 거의 맘먹을 정도였다며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 때에 나는 우리 아버지 월급이 당시 화폐로 삼만 원이 좀 못 되는 금액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러나 금지령 이후에도 이미 만화의 매력에 중독된 나는 어느 날 몰래 남동생의 돼지 저금통 배를 수술했다.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도록 만화방에 있다가 돌아온 날, 회초리로 호되게 꾸중을 들었지만 만화 중독은 점점 심해졌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부모를 떠나 객지에서 하숙하며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완전 만화 광이 되어 학교 근처 만화방에서는 더 이상 읽을거리가 없어 대전 시내를 원정을 다니며 만화를 보았다.시내에서 제일 큰 만화방 책꽂이에 꽉 찬 책들을 이미 다 섬렵했기에 그 날의 신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나의 학창 시절을 모범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항심이 많았던 시절이었다.학교에서는 명 강의라는 별명이 붙은 인기 있는 아버지였지만 집에서는 폭군이셨다.당시 인기 영화배우인 최무룡씨를 닮았다는 우리 아버지는 명문대를 수석으로 졸업하신 수재였다. 그러나 판검사가 되고 싶었던 아버지의 꿈은 형님 때문에 좌절되었단다.
항일 운동을 했던 애국자인 아버지의 형님은 해방 후 좌익에 속했단다.그것이 그 분의 아들은 물론 형제들까지 일생의 올 무가 되어 자신들의 꿈을 펼칠 수 가 없었다. 늦은 밤 정적을 깨는 발자국 소리와 “한이 맺혀! 피가 맺혀!”로 시작하는 아버지의 자작 노래와 함께 우리 집의 공포의 밤도 시작 되었다.
장독대의 고추장 항아리가 깨어지고 엄마가 예쁘게 발라 놓은 방문 창호지가 주먹질로 구멍이 나고 곤히 잠자는 우리의 머리 위로 아버지의 구두 발이 이불을 밟고 다녔다.
새벽녘 술기운이 다 떨어져야 겨우 아버지는 잠이 드시곤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한 것은 한번도 학교 출근은 늦는 법도 거르는 법도 없으셨다.전쟁에서 막 돌아 온 패잔병의 참담한 몰골로도 출근 시간은 정확히 지키셨다.학교 성적표를 받는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성탄절은 우리 오 남매에게는 단체기압을 받는 날이었다. 그날은 다락에 보관한 우리 집 가보인 누렇게 빛 바랜 올A학점자리 아버지의 성적표가 햇빛을 보는 날이었고, 보통사람이 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우리 집 법은 가차없이 징계의 매를 들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이 모이면 우스개 소리로 우리 아버지는 공부마귀 들었다고 농담을 한다. 아버지가 교장으로 재직하던 학교의 대학 진학률은 그 지역에서 언제나 탑이었다.
아버지는 공부 중독, 일 중독, 알코올 중독자 이셨다. 어린 시절 불안정한 감정으로부터 나의 도피처는 만화였다. 그 안에서 나는 주인공이 되어 마음껏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었다.
아치볼드 하트(Archibald D. Hart)의 ‘숨겨진 중독’이라는 책에서 대부분의 중독자들은 자신들이 참을 수 없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감정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중독자와 그 감정 사이에 완충 물을 놓는데 그것이 중독 행동이라고 한다.알코올 중독자는 인생이 너무 고통스러워 정면으로 참아낼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그래서 그 고통의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술에 의지한다. 인터넷 중독, 쇼핑중독, 일 중독, 성 중독, 음식 중독 등 모든 중독 행동은 그것이 다른 모든 인생의 문제보다 우선순위에 있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가 만드는 사랑과 로맨스의 중독도 그 중 하나이다. TV 나 영화에서 접하는 사랑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되는 것을 거부하게 한다.그러나 중독의 최종 결과는 우리의 진정한 감정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중독의 덫은 처음에는 그 중독행동이 자신의 감정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잊게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또 다른 감옥이 되어 고통으로 끝없이 몰아가는 것이다.어린 시절 강압적인 아버지로부터의 나의 도피처는 만화 속의 세계로 더 깊이 빠지는 것이었다.
요즘 시대로 말하면 나는 십대의 인터넷 중독 아이였다.
알립니다
본보가 매주 금요일 발행하는 종교 섹션에 길민화 목사가 새로운 필진으로 글을 쓰게 됐습니다.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한 길 목사는 남편 윤상희 목사가 담임으로 있는 산호세 성결교회의 알마덴 한국학교 초대 이사장을 역임후 현재는 교육 목사로 함께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시와 산문’으로 등단한 길민화 목사의 칼럼에 많은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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