랠프 엘리슨의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는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내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게 다가올 때 내 주변의 것이나 혹은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 꾸며진 것만을 본다. 그야말로 그들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다 보면서도 정작 나의 진정한 모습은 보지 않는다.”
관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소설 속 화자의 이 독백은 수많은 현대 예술 작품과 학문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굳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유명한 표현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일은 참 비일비재하다. 자녀가 있어 부모가 되는 예처럼 관계 정의성 가치를 넘어, 좋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자신의 좋은 면들을 보게 되는 경우도 그렇다.
2010년 한 해 동안 내가 맺었던 관계들을 돌아보게 된다. 그 관계 속에서 내가 새로이 찾아낸 가치들과 속 깊은 이야기들을 기억해 보게 된다. 혹 누군가를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만들지는 않았었는지, 또 랠프 엘리슨의 표현처럼 살과 뼈를 가진 실체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을 지척에 두고도 점점 투명해지는 자신을 느끼며 괴로워한 적은 없었는가도 말이다.
연말이 되면 늘 생각나는 뮤지컬이 있다. 바로 ‘렌트’이다. 뉴욕에 사는 젊은이들의 삶을 그린 뮤지컬 ‘렌트’의 마지막엔 늘 ‘사랑의 계절’(Seasons of Love)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울려 퍼진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연인과의 헤어짐과 만남, 일의 실패와 성공 등 크고 작은 일들을 겪은 주인공들이 모두 나와 함께 부르는 이 곡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낸 일년, 곧 52만5,600분의 기특한 시간을 위로하고 기념하고 자축한다. 그리고 노래는 그들만의 단순한 고백으로 끝나지 않는다. 듣는 모든 이들을 위한 질문이 되어 메아리친다.
“우리처럼 여러분들에게도 주어졌던 52만5,600분이라는 순간, 이제 그 시간을 무엇으로 기억하시겠습니까? 마신 커피 잔의 수로, 일상의 웃음으로, 아니면 흘린 눈물의 양으로요? 사랑은 어떨까요?”
등장인물들은 더는 악화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년을 시작하고 또 마친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 극의 시작과 끝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날마다 그들의 시간을 계산하고 또 일년을 기억할 수 있는 하나의 감정을 가슴에 품고 산다. 그건 물론 사랑이다.
그렇게 또 한 차례 세상의 눈으로는 미완성이 되어 버린 자신들의 일년 간의 삶을 추억하면서 그들은 당당히 그들의 52만5,600분을 완성시킨 사랑에 대해 노래한다. 극 중 누구도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어느 하나 스포트라이트 밖으로 밀려나 소외되어 있지도 않다. 서로를 간절하게 찾는 진실된 마음이 있어, 주인공들 중 누구도 쉽게 외롭다거나 일년의 삶이 의미 없었다는 말을 뱉지도 않는다.
어떤 이의 실체를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모두에게는 꽤 커다란 능력이 주어졌다. 우리가 관계 속에서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은 생각보다 넓고 강력하다. 이는 곧 그 능력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말하기도 한다.
새로 시작되는 2011년을 서로의 삶에서 함께 숨 쉬는 공생의 기록들로 채워보는 건 어떨까. 각자의 삶을 가득히 채운 사랑의 증거로 말이다. 사랑은 삶의 가장 진지한 과업이니까.
사랑 할지라/ 사랑 할지라/ 시샘 많은 시간이여.
노유미
CSUN 대학원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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