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의 절반을 훌쩍 넘은 캘리포니아 살기다. 20년 중 13년을 여기서 살아냈으니 이젠 확실한 캘리포니안 이민자가 됐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이곳에 적응이 잘 안 되는 게 하나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맞이하는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이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11월 중순 날씨답지 않은 더운 날씨 덕에 반팔을 입었었다. 그런데 금주엔 강한 비바람과 함께 찾아든 추위에 덜덜 떨었다. 그러자 추수감사절이 코앞에 왔고 또 감사절을 맞으며 당장 달력을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로 넘겨야 한다. 그러면 성탄절이다. 근데 성탄절 같지가 않다. 캘리포니아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이며 목사인 나는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을 ‘분위기’로 맞이해서는 안 됨을 잘 알고 있다. 분위기보다는 ‘의미’ 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뭔가 꺼림칙한 이유는, 성탄절 하면 추워야 되는 한국과 동부의 삶에 워낙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고, 또 거기에 전혀 협조가 안 되는 캘리포니아 자연환경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때면 거의 의도적인 적응기를 스스로 찾아 나선다. 이런 글쓰기가 한 좋은 예다. 그래서 이 때가 되면 한국일보를 비롯해 여기저기 글을 보내며 꼭 ‘시즌과 그 의미’ 문제를 의도적으로 다루곤 했다.
오늘도 역시 그러려고 한다. ‘분위기’가 아닌 ‘의미’의 성탄절을 생각해봄으로써 그것의 진짜 분위기(!)를 찾아보고 싶은 것이다. 그럼 어떤 성탄절 생각인가?
‘내려옴(descending)’으로서의 성탄절에 대한 의미다. 온 교회는 대체로 성탄절 앞 4주를 ‘대강절’ 또는 ‘강림절’로 지킨다. 영어로는 어드벤트(Advent)이다. 즉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그리스도의 ‘오심’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이를 ‘그리스도의 강림을 고대함’이라는 뜻을 지닌 ‘대강절’로 부르면서 지킨다.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우리는 성탄절에 그분의 ‘내려오심’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수평적인 나타남이 아니다. 수직적인 오심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오심이었다. 빌립보서라는 책에서 사도 바울은 그분의 수직적 내려오심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8].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일과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오는 일 중 어느 게 더 쉬울까? 물리적으로 보면 후자가 더 쉽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더 순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것은 가만 놔둬도 되는 일이지만 올리는 것은 외부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물리’가 아닌 ‘화학’적 차원에서 보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물론 여기의 화학이란 ‘의미’를 뜻하는 은유이다. 높고 탁월한, 고상하며 우월한 존재가 낮고 천하며, 유약하고 열등한 존재에게로 내려오는 것, 특별히 자신의 전 존재를 화학적으로 뒤바꾸면서까지 내려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아니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다. 바로 내려오신 그리스도에게서다.
이런 내려오심의 역설적 의미를 깨닫는다면 진정한 기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진정한 기쁨은 피상적인 기쁨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성탄절이 되면 무턱대고 기쁘고 기분 좋은 것은 피상적인 기쁨에 불과하다. 의미 없이 껍질만 남은 형식이 가져다주는 ‘문화적인 기쁨’일 뿐이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도 그런 피상적인 기쁨 속에서 이 날들을 맞이한다.
성탄절만큼 아이러니 천지인 것도 없다. 완벽하게 낮아져 섬기고 죽으러 오신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 ‘대놓고’ 좋아하는 저들의 모습이 아이러니다. 수직적 문제를 해결하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끼리 수평적인 선물들을 주고받는 모습 또한 아이러니다. 뜬금없는 징글벨과 산타가 끼어들어 주인행세 하는 것은 아이러니들 중 가장 압권이다. 아이러니가 홍수처럼 빈발하면 아이러니 무감각 증세가 생긴다. 아이러니의 대상이었던 그것이 오히려 정상적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다. 성탄절이 대표적인 그런 거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 성탄절만큼은 그분의 내려오심의 의미를 잘 묵상해야 한다. 어떤 의미인가? 낮아지시기 위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오신 그분의 내려오심이었다는 의미다. 이 점을 세상에 전시하라고 있는 성탄절에 그리스도인들마저 흥청망청 지내면 안 될 일이다. 사실 이러한 본질적인 의미만 잘 간직해준다면 뭐가 문제겠는가? 명절 분위기 잘 못 타는 캘리포니아인인들, 심지어 남태평양 한 복판의 하와이인인들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수도장로교회 담임목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