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한국 강원도 전방에서 군복무를 할 때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내무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몇 시간 뒤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지만) 했다는 것이다.
유사시에 대비, 트럭에 각종 장비와 개인 물품을 실어 나르고, 개인에게 실탄 등을 지급하느라 온 부대는 부산하게 움직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출동명령을 기다리며 동료들과 막사 뒤에서 담배 연기를 길게 들이 마시고 있을 때, 한 동료가 한 마디 내뱉었다. “젠장, 군복무 3년에 전쟁까지 뛰고 가게 생겼네.”
이 말에 모두들 웃었지만, 속마음은 “정말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감에 젖어들고 있었다. 한국에서 군 생활을 경험한 남성들이 누구나 그렇듯이, 나 역시 그때의 시간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좋았던, 싫었던 간에 긴장을 강조하는 군 생활이 정신세계에 미치는 파장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잠을 자다 꾸게 되는 꿈들 가운데 가장 싫은 것 중 하나가 ‘입영 통보’를 받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것들도 결국은 분단의 역사, 대립의 현실이 불러온 산물이 아닌가 싶다.
23일 한국 영토에 포탄이 날아들었다. 한 두 발도 아닌 170여발이나 연평도에 쏟아지면서 두 명의 해병이 꽃다운 나이에 전사했고, 민간인 두 명도 숨졌다.
그리고 많은 가옥들이 파괴됐다.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번 북한 공격이 연평도 해병 기지가 주 타깃이었던 만큼, 군 피해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태는 휴전 이후 벌어진 물리적 충돌 중 가장 심각하다는 점에서 심히 안타깝고 염려스럽다. 더욱이 쌍방이 수 백발의 포격을 주고받았다는 것은 언제든지 한반도에서 이와 유사한, 아니면 더 큰 군사적 충돌이 가능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확인시켜 준 셈이 됐다.
문제는 이런 물리적 충돌이 발생해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카드가 한국 정부에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더욱 답답한 것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다.
정치권은 대통령의 ‘확전방지’ 발언의 진위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이면서, 군의 대응방식이 미흡하다고 비난하고 있다. 사실여부를 떠나 강경대응이 실제 확전으로 이어졌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주요 군사기밀을 접하는 국회 국방위원회는 중요한 전략 요충지인 연평도에 고작 자주포 6문만 배치돼 북한 화력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까? 또 요즘 한국이 새로운 무기를 개발할 때마다 ‘세계 최강’ ‘명품무기’라는 수식어를 달며 대북 군사력의 ‘질적 우위’를 강조하지만, 한 번도 실전에 사용해 보지 않았다는 것은 잊어버린 것일까?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행태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말도 안 되는 글을 인터넷을 올리는 소수 ‘무개념 네티즌’들은 아예 분노를 느끼게 만든다. “아빠 생일의 축포” “피란 짐을 명품에 싸고 싶다”는 식의 무책임한 글들이 전혀 여과없이 온라인상에 오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실망스럽다.
최전방에서 국가를 지키다 사체가 수습되지 않을 정도로 처참하게 죽어간 병사에게 경의를 표하지 못할망정, 이런 식의 망언을 글이라고 올릴 수 있는 사회가 정말 제대로 된 나라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연평도 포격 사건은 3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뒤로 하고 1957년 7월27일 체결된 협정이 단지 ‘휴전’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
지금은 감정을 앞세우기 보다는 앞으로 또다시 벌어질 수 있는 군사적 충돌을 피하면서 절대적인 힘의 우위에 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무책임한 언행은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황성락 특집 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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