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에서 한 TV 프로가 큰 히트를 쳤다.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다. 노래 생짜들을 모아놓고(그 중엔 아닌 자들도 있었음) 합창단을 조직해 전국합창경연대회 도전기를 방영한 프로다. 이 프로는 연습 과정에서 일어나는 해프닝들, 여러 웃고 울고 했던 사연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그리고 결국은 수상까지 하게 된 전 과정을 하나로 잘 엮어냈다.
그 중 기억나는 하나는 그들이 선택한 두 곡 중 첫 곡이다. 과거에 인기 끌었던 만화영화 주제곡 메들리였다. 나이가 들어선지 내 입에서 도는 곡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때마침 방학이어서 집에 방문했던 대학생 조카는 금방 따라 부를 정도로 친숙한 곡들이었다. 그들의 장난스런 율동과 깔끔한 화음이 맘에 와 닿았다.
그 곡을 들으며 생각난 게 있었다. 우리 인생은 만화 같은 인생이라는 점이다. 나의 경우 본격적으로 TV 드라마를 볼 수 있기 전엔 만화를 통해 인생을 배웠던 것 같다. 거짓말해가며 엄마로부터 탈취(?)한 돈을 만화방에 계속해 갖다 바쳤다. 급기야는 그 만화들이 TV 수상기와 극장 화면에 확대되어 내 눈을 자극시켰고 자극된 시각은 내 맘을 더 만화 같이 만들어버렸다.
그 면에서 많은 게 나아진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인생에 갈수록 허구적인 측면만 더 늘어나는 것 같고, 그 허구성 증식에 대단한 한 몫을 하는 게 곧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TV 드라마며 영화들이다.
2세권인 내 아이들과 함께 재밌게 본 최근의 드라마는 <제빵 왕 김탁구>다. 잘 지켜보면 이 드라마는 인기와는 달리 허구성이 지나치다. 빵 공장 사장 집이 왜 그리도 화려한지 모르겠다. 위기에 빠진 공장이 신화적 주인공이 만든 신제품 하나로 금방 회생된다. 한국 기업구조가 그렇게 만만한 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중요한 비밀은 왜 그리도 엿듣는 사람이 많은지 모를 일이다. 또 그로 인해 상황은 급변한다. 그게 곧 주인공에게 기적 같은 역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어쨌든 허술하기 짝이 없는 판세다. 하지만 그래도 열광한다. 왜일까? 모두들 만화 같은,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딸 아이 일화가 있다. 딸이 어렸을 때 하룬가는 느닷없이 부모로서 듣기 기분 좋은 한 마디를 던졌다. 자긴 크면 꼭 하바드 대학을 가겠단다. 너무 솔깃해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물었다. 이유가 가관이었다. <리걸리 블론드>라는 영화를 봤는데 거길 보니까 하바드 대학은 날마다 파티를 하더란다. 그 영화는 하필이면 하바드 대학을 배경 삼아 찍었는데 그 대학의 본 모습과는 영 맞지 않는 방향인 ‘파티와 놀기’가 그 주제였던 것이다. 딸은 영화를 잘못 본 것이다. 아니 잘못된 영화를 본 것이다.
하나 더 있다. 역시 꽤 어릴 때 어느 날 욕조 여기저기에 촛불을 켜놓고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음악까지 틀어놓고 말이다. 물론 그날의 그 목욕은 간단한 샤워가 아닌 소위 ‘거품 욕(foam bath)’이었다. 와인만 안 마셨지 영락없이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아마 어느 영화의 한 장면에서 아주 찐하게 클릭되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아내와 난 그때 한숨조로 이런 대화를 나눴다. “여보, 쟤 영화 너무 많이 본 것 같애.”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인생은 이미 너무 만화 같고 너무 영화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역설이 있다. 우리 인생들이 어쩌면 만화 같지 않고 영화 같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만화 같고 싶고 영화 같고 싶은데 실제론 만화 같지 않고 영화 같지 않기 때문에 TV 스위치를 켜고 영화관을 찾아가는 것이다. 내가 그러지 못하는 것을 영화 속 주인공이 대신해주는 것 같아 거기서 진한 감동과 쾌감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이를 어려운 말로는 ‘자기 정화작용(self-catharsis)’라고 하던가?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자. 현실은 픽션과 너무 다르다. 논픽션 인생을 너무 픽션처럼 살려다 보면 엉뚱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경우야 각각 다르지만 최근에 많이 발생하는 자살에는 그런 측면이 많이 작용한다.
신앙인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현실을 쉽게 외면한다. 신앙생활에다가 픽션적 요소를 너무 가미하는 듯이 보인다. 일요일의 예배 감격과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현실의 삶을 그것으로 잘 버텨내며 풍성히 누리게 하기 위함이다. 신앙은 픽션이 아니다. 단지 픽션처럼 보이는 논픽션일 뿐이다. 좋은 신앙인은 그것을 알고 오늘의 현실을 믿음과 은혜로 살아가는 자이다. 너무 영화처럼 살려고 하지 말고 너무 드라마처럼 신앙생활 하려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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