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충무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잠간 들리겠다”고 전화를 주신 후, 사무실을 찾아오셨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이번에 집필하신 책이 나왔다며 책에다 사인을 해서 나에게 건네 주셨다.
“건강은 어떠세요?” 하니 죽음이 바로 저편에서 부르고 있다는 걸 아시는 듯, 힘없이 “오래 못 갈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2-3년 전, 처음에는 간단한 감기로 알고 항생제를 드시다가 급격히 나빠진 건강에 병원에 가 정밀 검사를 받으니 백혈구가 다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
그 후로, 시작된 그분의 투병생활은 투병이라기보다는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듯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손가락에 마비가 와 침과 마사지로 치료하면서도 집필을 쉬지 않았다.
사람이 세상에 나와 자기의 목숨보다 더 중히 여기는 일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분의 사상이나 배경을 뛰어 넘어 그분이 자기가 믿고 있는 신념을 위해 일하다 가셨으니, 어쩜 그분은 후회 없는 삶을 살다 가신지도 모른다.
그분의 장례식 날, 나는 사람들이 많이 붐빌 것 같아 서둘러 갔다.
하지만 그분의 장례식은 그분의 삶과도 같이 쓸쓸하고 외로운 마지막이었다. 4-50명 남짓 모인 장례식장. 가족과 교인과 몇 분의 지인이 전부였다. 문득 한국 속담이 생각났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요, 정승이 죽으면 파리 날린다”라는 말이…. 평생 언론에 몸 담았던 언론인을 마지막으로 보기에는 마음이 아팠다.
불과 2 주전에 내 앞에 계셨던 그분이 차가운 관속에서 나를 쳐다보고 계신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고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하얀 얼굴 꼭 닫은 눈과 약간 부은 듯한 눈, 그리고 홀쭉한 볼, 그리고 가냘픈 광대뼈가 안쓰러워 보였다.
삶과 죽음은 그런 것인가 보다. 삶을 더 고집할 수도, 죽음을 더 거부할 수도 없는 인간의 한계 말이다.
서슬이 퍼랬던 젊은 시절도, 미국으로 와 과거사를 집필하느라 병까지 얻었던 일도. 이제는 다 옛 일이 되어 그 분과 함께 묻혀 버렸다. 다음 달이면 또 다른 책이 탄생한다고 좋아하셨는데, 그것을 못 본 채 안타깝게 돌아가신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나는 그분의 죽음 앞에, 내가 언젠가 반드시 누워 있어야 할 관 앞에서 나를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가고 난 후 내 가족은 나를 어떻게 기억해 줄까? 내 주위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해 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해 주러 올 것인가? 나는 심판자 그 분 앞에서 얼마나 당당하게 내 자신을 변호할 수 있을까? 죽음은 또 다른 하나의 삶의 시작이지만, 보내는 사람 마음이 이토록 쓸쓸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는 “우리 모두가 다 죽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 알면서도 “날짜를 모른다”는 교만함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한다.
정해진 시간을 살다가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일 것이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하는 이 세상에서, 나부터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배우고 싶다. 나에게 충실한 삶, 나로 인해 남이 행복해 질 수 있는 삶, 내 자신이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삶이었다고 그 날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매한 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고, 현명한 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했던가!
망자를 보내고 온 후, 나는 옷자락을 다시 한 번 여미고 내 자신에게 말했다. 나의 삶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고…. 그리고, 그 날 앞에 당당하기 위해 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자고 다짐했다.
“손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고통이 없는 그 곳에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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