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행복전도사라는 타이틀로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던 여류명사가 자살했다. 그가 가르쳐주었던 ‘행복’이란 답안지를 들고 도전받았던 사람들은 졸지에 그가 내민 답안지의 불행한 뒷장을 보고 망연자실했으니 참으로 드라마틱한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그의 죽음을 높게 평가하거나 낮게 폄하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원래가 행복이란 그만치 어려운 화두라는 뜻이다. 그래서 차제에 과연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조건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은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나 자신은 정말 똑똑하지 않은데 남들이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여 사실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분수를 모를 때 건방을 떨고 불행해지는 법이다.
다음으로 명심할 일은 인생을 즐겁게 살아보려 노력하는 것이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 만족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갈 때 행복을 맛본다는 진리다. 행복은 먼저 내게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행복을 향해 가는 것이다. 백만 불을 쥐고서도 불행한 인간이 있고 만 불만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 물론 그 만 불을 장롱 속에 보관해 놓고 궁핍한 얼굴로 불행하게 사는 분도 있긴 하지만.
어릴 때는 산타크로스를 믿었다. 행복한 시절이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철이 들면 산타크로스를 안 믿는다. 매사를 불행한 시선으로 보는 세월이 시작 된다. 그런데 그 불행이 행복으로 바뀔 때가 있다. 바로 내 자신이 산타크로스가 될 때이다. 그런 의미로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옛말은 명언이다. 행복을 갖기 위해 정신없이 뛰기보다는 조금쯤 느리게 사는 방식이 안분지족이며 행복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낚시를 갔다. 늘 바쁜 생활이다 보니 아들과 함께 하지 못해 그게 마음에 걸린 아버지가 작심을 하고 아들을 위해 시간을 냈다. 그렇게 아버지와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아들이 그날 일기를 이렇게 썼다. “오늘은 아빠와 함께 낚시를 다녀왔다. 내 일생에 가장 기쁜 날이다.”
그날 아들과 함께 낚시를 갔다 온 아버지도 그날의 일을 일기로 남겼다. “오늘은 아들과 함께 낚시를 다녀왔다. 그 바람에 하루를 완전히 날려버리고 말았다.” 같은 현상을 두고 아버지와 아들은 그 느낌이 달랐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내가 결정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목사는 언제나 구름 위를 거닐며 사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한다. 행복과 만족을 주머니에 가득 넣고 사는 사람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오해는 금물이다.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웃을 뿐이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므로 행복하게 되는 방정식이다. 그 행복은 “Happy”가 아니다.” 하늘에서 주는 “Bless”가 정답이다.
어쩌면 인생은 있지도 않은 행복이라는 신기루에 휘둘리다가 불행하게 끝나는 존재일지 모른다. 행복(Happy)은 원래 어디서 왔을까. 우연찮게 갑자기 내게 일어난 찰라적 사건(Happen)에서 왔을 뿐이다. 결국 행복이란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다.
아들 딸 때문에 행복한가? 복권 당첨이 행복일까? 그 아들딸이 불행의 시작일 수 있다. 그 복권이 저주의 심포니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행복보다는 가난한 ‘복’을 기다려야 한다.
내 정체성을 파악하고 그 앎을 바탕으로 낮은 생을 모토로 삼았을 때 가난하고 작지만 심령이 편한 ‘복’이 찾아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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