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시험이 있었다. 물론 예정된 시험범위도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학교 도서관으로 출발했다. 아침까지 걸러 가며 가까스로 해야 할 공부를 마치고 5분 정도 일찍 강의실에 도착했다.
아직 교수님은 도착하지 않았고 난 그 짧은 시간이 아까워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반 페이지 정도 읽어나갈 즈음 강의실로 들어오는 교수님의 경쾌한 구두소리가 들렸다.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의 눈을 일일이 맞추며 밝은 표정으로 이런 저런 인사들을 나누던 교수님은 잠시 후 펜을 제외한 모든 소지품을 치우라고 하며 시험지를 돌리기 시작했다.
시험지가 넘어오는 내내 마치 도미노가 넘어지듯 얕은 괴성들이 연이어 들리기 시작했다. 넓은 시험지에는 단 한 줄의 문장만이 써 있었다.
“Write a Poem!”
순간 머릿속은 시험지보다 더한 백지가 됐다.
‘시를 쓰라니......’
문학관련 강의이기는 하지만 교과내용이 시작(詩作)과는 무관했다. 돌발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는 학생들을 향해 교수님은 앞으로 한 시간 내에 하나의 시만을 완성해도 좋다며 모두를 안심시켰다. 특별한 주제를 주지도 않았다. 학생들은 이내 잠잠해졌고 강의실에는 이전에 없던 정적이 흘렀다.
여느 시험시간과는 다르게 우리는 이따금씩 서로를 바라보다 짧은 미소를 짓기도 하고 창밖을 응시하기도 하며 한 줄 한 줄 백지를 채워나갔다.
한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고 다들 아쉬운 표정으로 시험지를 냈다. 그 때 교수님은 방금 지은 시를 직접 낭송해보자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낭송을 잘 하면 추가 점수를 얹어주겠다고 하셨고, 추가 점수라는 말에 모두가 선뜻 교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창가 쪽 맨 앞자리에 앉은 귀여운 금발머리 여학생부터 낭송을 시작했다. 그 후 40여 분 간 모두가 지은 시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우리는 서로의 시에 깊게 공감할 수 있었으며 또 함께 고민할 수 있었다.
낭송이 끝난 후 교수님은 모두에게 좋은 점수를 주겠다고 하시며 잠시 주위를 둘러보라고 했다. 교수님의 말대로 반 학생들에게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이 느껴졌다. 그리고 시라는 매개를 통해 낯설지 않게 서로에게 받아들여지는 지금의 모습이 기적 같지 않느냐는 의외의 총평을 덧붙이셨다.
시에는 ‘평행법’이라는 문장 양식이 있다. 음악의 ‘변주’와 흡사한 시의 형식적 특성을 일컫는다. 기본 주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하는 전달방법의 변화를 통해, 감상자들에게 다양한 감상의 기회와 익숙한 것들 속에서 새로운 요소들을 찾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평행법의 ‘평행’은 일정하고 반복적인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것들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한 선상의 여러 지점을 뜻한다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평행법은 양식 안에 묶인 여러 개체들에서 차이가 아닌 궁극적인 공통점을 찾기 위한 장치가 된다.
교수님의 말을 들으며 문득 이 문장 양식이 떠올랐다. 나와는 얽힐 수도 또 닿을 수도 없는 평행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던 낯선 외모의 사람들의 내면에서 익숙한 내 안의 감정들을 발견하면서 말이다.
10월의 의미가 ‘시월(詩月)’일거라고 이야기하던 친구가 있었다. 바로 그 10월이 됐다. 시상은 주위를 둘러보는 우리 눈에서 무심함을 걷어내는 순간 찾아오는 거라고 했다. 시월이라는 핑계 삼아 잠시 주위를 애정과 관심이 가득한 눈으로 둘러보면 어떨까. 이번 가을은 그래서 낯설다고 믿어왔던 사람들과 사건들 속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익숙함을 만나는 시 같은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노유미/CSUN 대학원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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