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계신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워낙 연세도 있으셨고 병원에도 오래 입원해 계셨던 터라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할머니와 통화를 했는데 할머니는 병색이 완연한 목소리로 “우리 큰 손녀 보고 싶다, 언제 한국에 올 수 있느냐”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 곧 갈게요. 저 갈 때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하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 했지만, 그나마도 국제 전화비 걱정하시는 할머니 때문에 빨리 끊어야 했다. 그것이 할머니와의 마지막 통화였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맏며느리로 평생 할머니를 모셔야 했던 엄마와는 고부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첫 손녀였던 나에게 거의 신앙심에 가까운 사랑과 믿음을 보여 주셨다. 나는 어렸을 적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할머니에게는 절대 혼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엄격하셨던 부모님 앞에서는 엄두도 못 낼 행동들, 예를 들어 밤에 과자를 사달라고 한다거나, 가족들이 식사하는 시간에 만화책을 읽겠다고 고집을 부려도 할머니는 늘 흔쾌히 “오냐, 그렇게 해라”라고 하셨다.
할머니의 사랑은 각별해서 어른이 되고 나서도 나는 할머니라는 절대적인 내 편이 존재했던 어린 시절에 아련한 향수를 느끼곤 했다.
그러나 그건 내 입장이고, 할머니의 나에 대한 과도한 애정은 엄마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훈육하는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었다. 할머니가 집에 오시는 날이면 내가 숙제를 안 하고 놀거나, 엄마가 시킨 심부름을 안 하고 할머니 뒤로 슬쩍 숨는 것으로 엄마의 잔소리를 피했기 때문이다.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혼이 나도, 할머니가 “애 너무 나무라지 마라” 하시면 곧 상황이 종료될 것임을 어린 나이에도 벌써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편애도 없지 않아서 다른 손자손녀들에게 하시는 것과 비교가 될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잘 익은 홍시를 가져 오셔서 동생들 몰래 나한테만 주신다거나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나에게 형제와의 우애를 강조하시며 나눠 먹게 하기 위해 진땀을 빼셨다. 어쨌건 나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그랬던 할머니를 이제 다시는 뵐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역만리에 산다는 핑계로 고작 가시는 길 편안하시기를 기도하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 게다가 사람이란 얼마나 간사한지, 시간이 좀 지나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금세 일상으로의 복귀가 가능했다.
살면서 앞으로 또 어느 누구에게 할머니에게서 받았던 무제한적이고 한결같은 사랑을 받아 볼 수 있을 것인가.
결혼 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사랑한 게 분명했던 남편에게조차도 그런 기대는 무리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인지했고, 지금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가 언제 “엄마는 몰라도 돼!” 하며 문을 꽝 닫고 반항하는 나이가 될 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할머니의 부재가 더더욱 가슴 아프다.
살아 계실 때 더 잘해 드릴 걸, 전화 한통이라도 더 드릴 걸… 때늦은 후회는 늘 가슴을 후비는 법이다. 법정 스님이 “선물은 살아 있을 때 주라”고 하셨다.
살아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시길, 카르페 디엠.
지니 조 / 라이프대 마케팅 교수 /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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