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찾은 제주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체류 기간 중 절반은 아침, 저녁으로 안개비가 내렸지만 이 역시도 LA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라 가슴 한켠을 알싸하게 만들었다. 눈 덮인 한라산은 평화로웠으며, 서귀포 어귀에 서서 물끄러미 내려다 본 비 내리는 제주 바다는 너무 애잔해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릴 뻔도 했다.
그러나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주를 못 잊어 하는 까닭은 이런 그림 같은 풍경들보다는 바로 ‘올레’때문이다. 올레란 집 대문에서 마을길까지 이어지는 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제주 출신인 언론인 서명숙씨가 나이 쉰에 기자 생활을 접고 스페인 산티아고 길 순례에 나섰다 고향 제주에도 이런 길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2007년 9월 제주도에 첫 도보 코스를 연 게 올레의 시작이다.
그 뒤 그녀는 끊어진 길을 잇고, 잊힌 길을 되찾고, 사라진 길을 불러내면서 지금까지 총 12코스를 개발했다. 현재 제주 올레는 ‘올레 폐인’이라는 신조어를 불러일으킬 만큼 공전의 히트를 쳤다. 올레 폐인은 1년 중 제주에 머문 기간이 100일을 넘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며, 아침에 일어나 서울 날씨보다 제주도 날씨를 먼저 챙기는 ‘올레 중독’도 있을 만큼 제주는 전국적으로 ‘느리게 걷기’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일약 관광명소로 떠올라 제주의 효자 관광 상품이 됐다.
최근 서씨는 이 올레 위에서 펼쳐진 다양한 사연을 책으로 엮었다. 이 책 속에선 서먹서먹하기만 했던 아버지와 사춘기 아들이 올레를 걸으며 17년간 나눴던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1주일만에 쏟아내는가 하면 쉰 줄에 들어선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의 아들은 올레에서 팔순 노모를 처음으로 업어 드린 뒤 ‘이렇게 가벼우신 줄 미처 몰랐다’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1등만 기억한다는 무한 경쟁사회에서 그래서 승진도, 재테크도, 출세도 남보다 빨리빨리 해야 하는 한국에서 올레가 이렇게 공전의 히트를 친 것은 그 속도전에 지쳐 가는 현대인들에게 느림의 미학이 서서히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속절없이 오래도록 걸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굳이 그곳이 올레가 아니더라도 홀로 길을 걸어본 이들은 그 지독하게 외로운 여정 속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때론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비워내고 오롯하게 자신과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평화와 치유를 얻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오늘 저녁, 집 근처 산책로라도 한번 느긋하게 걸어보길. 분명 거기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먹고살기도 바쁜 이민생활에서 가당키나 한 소리냐’며 핀잔을 주는 당신에게 여기 빨리 걷다 넘어진 손자에게 제주 할망들이 건넨다는 말 한마디를 들려주고 싶다.
’재기재기 와리지 말앙 꼬닥꼬닥 걸으라게.’(빨리빨리 서둘지 말고 천천히 걸어라) 제주 할망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남들에게 뒤질 새라 ‘재기재기’ 걷다간 넘어질지도 모르니 새겨들어 봄직 하지 않겠는가.
이주현/경제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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