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즘’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얼굴에 반하여 샘물에 빠져 죽은 데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나르시즘’는 누구를 막논하고 일생에 한번 쯤은 일어날 법한 감정으로서, 특히 청춘의 시기에 생기기 쉬운 감정이다. 청춘의 남녀들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때가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며, 이성에 유혹되기 쉬운는 때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나르시즘에 젖기 쉬운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사랑이란 일방통행이 아니라 상대방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인, 즉 나르시즘의 표출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나르시즘)이 없고 스스로 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랑에 빠지기는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이 세상에서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해 나가기는 쉽기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사랑에 대해서는 맹목적이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무한하고도 절대적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지나친 아집에서 벗어나려고 예술을 하고 학문을 하고 또 마음을 닦는 것이겠지만 또한 이러한 이기적인 본능에 대해 상처주거나 상처받는 문제에 지나치게 마음 상하는 것도 일종의 ‘나르시즘’의 하나일 것이다.
비제의 오페라 ‘칼멘’을 보다보면 유명한 ‘투우사의 노래’가 나온다. 칼멘이 부르는 ‘하바넬라’, 돈 호세가 부르는 ‘꽃노래’와 함께 이 오페라를 이끌어가는 3대 플롯인 이 작품은 가장 남성적이고도 씩씩한 노래로서 바리톤들이 즐겨 부르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어쩐일인지 ‘칼멘’을 보면서 ‘투우사의 노래’에 감동받거나 투우사에 대해 주인공의식을 느낀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다른 사람들은 어쩐지 모르지만) 왜냐면 투우사야말로 칼멘과 돈 호세의 사랑을 방해하는 가해자로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별로 정신적인 매력이나 애정을 느낄만한 면도 없으면서 칼멘을 힘으로만 유혹하는, 그저그런 마초맨으로 그려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때문이다. 그러나 이 ‘칼멘’이라는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투우사는 칼멘을 순수하게 사랑했을 뿐 가해자로 정죄받을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자신을 늑대로 비교하고 싶은 남성들은 없을 테지만 남성들은 모두 어느정도는 늑대라해도 무방(?)하다. 사회적인 제약, 체면 때문에 본능을 억제하고 있을 뿐 기회만 되면 모두 양을 잡아 먹기 위해 잔뜩 움크리고 있는 것이 남성의 실체라고 하면 조금 과한 얘기가 될까? 물론 이 본능이 꼭 나쁜 것 만은 아닐 것이다. 욕망이란 사람에게 발전의 계기를 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오페라 ‘칼멘’을 보고 있으면 투우사와 돈호세 중 누가 진정한 늑대인지 헷갈리게 될 때가 있다. 투우사는 이 작품 속에서 힘찬 남성상, 즉 뭇 여성들을 쉽사리 휘어 잡는 마초맨으로 그려지고 있고 돈 호세는 사랑만을 좇다가 절망하게 되는 사랑의 패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본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꺼꾸로 되어 있다. 사실 늑대는 약혼녀를 두고도 집시(여인)의 외모에 반해 버린 돈 호세였고 투우사는 그저 수많은 여인 중의 하나로 칼멘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일방적으로 상처받는(피해자) 쪽은 돈 호세로 그려져 있고 투우사는 큰 잘못도 없는데도 가해자(늑대)로 생각되기 쉽다.
정열과 순수는 매우 반대되는 요소인 것 같아도 오페라 ‘칼멘’에서처럼 결국은 같은 모습을 한 동전의 양면임을 알 수 있다. 즉 정열이 자기 편에 섰을 때는 순수한 사랑이라 부르고 다른 편에 섰을 때는 늑대의 모습만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에 빠지면 낭만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불륜의 잣대를 들이대곤 하는 것일 것이다. ‘늑대’와 ‘나’? 상상하기도 싫은 다른 모습이지만 결국 같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우리에겐 과연 있을까? 다소 시시콜콜한 상상의 비약이지만 아무튼 오페라 ‘칼멘’은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인간의 나약한 모습, 특히 인간이란 얼마나 정열의 포로가 되기 쉬운 존재인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물론 중심되는 플롯은 정열이고 그 정열이 부르는 것은 무한대의 비극이다.
늑대의 본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사람이 실제적으로 늑대일 경우는 무척 드물다. 문제는 자신 보다 언뜻 우월해(?) 보이는 투우사에 보내지는 돈 호세의 불같은 질투심이다. 모두 알다시피 이 작품은 한 기병대 장교가 집시여인을 사랑하다가 그 사랑이 배신으로 돌아오자 결국 질투심을 참지 못하고 함께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비극이 주제다. 돈 호세는 왜 그런 끔찍한 결말을 결심했을까? 사랑에 대한 상처때문에? 그것만은 결코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거대한 늑대, 그 어쩔 수 없으면서도 또 마음 한켠에서는 경멸하는 늑대(투우사)에게 마음이 빼앗겨버린 칼멘에게 받은 상처가 더욱 그를 절망케하고 분노로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아닐까? 칼멘이 만약 자신 보다도 못한 상대와 사랑을 주고 받고 있었다해도 칼멘을 죽이고 싶을만큼 절망감이 컸을까? 산다는 것은 참 그런 것 같다. 보든 것이 자신이 주체가 되다보니 남의 것에 대한 질투, 불행의 씨앗이 되는 것 같다. 사실은 늑대이면서도 아닌 척 살아가는 돈 호세 남성들이여, 오늘 하루만은 투우사의 노래를 들으며 그 돈 호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봄이 어떨까? 남성적이며 정열적인, 투우사의 노래를 들으며 잡다한 상념을 떨쳐버리고 거리를 한번 힘차게 행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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