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가족’이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10년 쯤 전부터였다. 새 천년을 맞아 한국에서 글로벌 인재를 양성한다며 영어교육 열풍이 불더니, “그렇다면 아예 … “ 하고 조기유학 길에 나서는 가족들이 늘었다.
자녀교육이라면 맹모는 저리 가라인 한국 부모들에게 ‘기러기’는 영리한 대안으로 보였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자녀를 영어권에서 공부시키고 싶은 데, 어린 아이를 혼자 유학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식구가 다 같이 외국으로 나가기도 어려웠다. 장기체류 비자를 얻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한국에서 잘 나가는 가장이 사업·직장을 접고 무작정 외국으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역할분담.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미국, 캐나다, 혹은 뉴질랜드로 가서 공부시키고, 아빠는 한국에서 돈 벌어 유학비용을 댄다는 구도였다. 몇 년 고생하면 아이의 장래가 보장된다는 데 부모로서 그만한 희생을 감수 못하랴 하는 생각이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남가주를 비롯한 미전역에 ‘기러기 엄마’ ‘기러기 아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지나면서 ‘기러기 아빠’는 세 부류로 나뉘어졌다. 엄마와 아이는 여전히 ‘기러기’ 인데 아빠는 경제적 능력에 따라 ‘독수리’ ‘기러기’ ‘펭귄’으로 나뉘었다. 가장 능력 있는 아빠는 독수리. 가족들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 날아갈 수 있는 튼튼한 날개, 경제력을 지녔다.
다음 ‘기러기 아빠’는 철새처럼 계절 따라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는 아빠. 마지막 ‘펭귄 아빠’는 아등바등 생활비 마련해 보내느라 정작 자신은 가족들 얼굴 한번 보러 갈 수 없는, 발 묶인 아빠이다.
‘펭귄 아빠’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비극은 예견된 것이었다. 가족이 함께 살아도 부부 문제가 생기고 문제아가 나오곤 하는 데, 몇 년 씩 얼굴 한번 못 보면서 문제가 안 생긴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아빠는 가족들 생활비 대느라 등골이 휘고, 홀아비 아닌 홀아비 생활에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다. 해가 갈수록 부부사이는 서먹해지고, 영어권에서 자란 아이와는 남남이 따로 없다.
‘기러기 엄마’라고 남편 없이 하는 외국 생활이 쉬운 게 아니다. 말은 통하지 않고, 교육 시스템은 생소하니 아이의 공부를 제대로 도와줄 수도 없다. 일부 기러기 엄마들이 중독에 가까운 골프나 다른 유흥에 빠지는 것은 텅 빈 시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기러기 가족들을 심심찮게 보아온 LA의 한 어린이학교 원장은 가족이 떨어져 지내면 결국은 문제가 생기더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라는 양쪽 롤 모델을 보며 자라야 건강하고 그게 바로 교육이지요. 조기유학 욕심에 부모들이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기러기 가족’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지난주 뉴질랜드에서 일어났다. 남편의 사업부진으로 생활고에 부딪친 ‘기러기 엄마’가 두 딸을 데리고 동반 자살했다. 그러잖아도 기진맥진하던 ‘기러기 아빠’는 놀라서 뉴질랜드로 달려갔고, 가족의 장례식 날 그 역시 자살로 아내와 딸들을 따라갔다. 많은 문제들이 드러나면서 한국에서 ‘기러기 가족’이 차츰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은 그나마 다행이다. ‘기러기’라는 시행착오는 더 이상 반복되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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