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토끼 마을에 춥고 배고픈 늑대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돼지가 살고 있었다. 이 늑대는 심심하면 이웃을 물고 분탕질을 치는 것으로 정평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담장을 맞대고 있는 돼지가 주로 피해를 입었다.
늑대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돼지는 늑대에게 정기적으로 살점을 상납하는 조건으로 더 이상 괴롭히지 말 것을 제안했고 늑대는 흔쾌히 이 안을 받아들였다. 한 동안 평안한 나날이 계속되는 것 같았지만 무슨 영문인지 때로는 새끼 늑대들이 담장을 넘어와 아기 돼지를 물어 죽이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별로 돌아오는 것도 없이 살점을 뜯기는 아픔에 지친 돼지는 어느 날 더 이상 살점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살점을 물러 온 새끼 늑대를 때려 내쫓았다. 이 와중에 새끼 늑대 몇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살점을 얻어오는 대신 시체로 돌아온 새끼 늑대를 본 어미 늑대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리저리 공갈 협박을 했지만 한 번 돌아선 돼지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미 돼지가 곤히 잠든 한밤중에 새끼 돼지들이 무더기로 물려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위에서 이런 일을 저지를 짐승은 하나밖에 없지만 불행히도 현장을 본 이가 없고 물증도 없기 때문에 늑대보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이런 일이 벌어진 지금 엄마 돼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확증이 나올 때까지 언제까지나 팔짱을 끼고 묵묵히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면 과거 행적으로 봐 유력한 용의자가 있는 만큼 더 이상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담장을 높이 쌓고 늑대의 움직임에 각별한 감시의 눈길을 보내는 것일까. 생각이 있는 돼지라면 답은 자명하다.
천안함 사건이 터진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지금까지 조사 결과 바다 한 가운데를 순항 중이던 한국 해군함정 배 가운데 밑바닥을 암초가 들이받았다는 설이나 내부 폭발설, 내부 균열설 등은 가능성이 희박하고 어뢰나 기뢰, 특히 어뢰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북방 한계선 부근에서 한국 함정이 어뢰를 맞았다면 누가 쐈을까는 분명할 것 같은데 아직도 물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가능성에 마음을 여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가능성의 경중도 따질 줄 알아야 한다. 북한 어뢰설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설마 우주인이나 물귀신이 쐈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럼 미국이나 일본, 중국 잠수함이 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북한 어뢰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서해 밑바닥에서 ‘나는 천안함 폭파를 위해 만들어진 북한 어뢰 파편임’이라고 쓰인 물증이 나오더라도 이는 미국이나 한국 우파의 조작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만에 하나 북한이 이를 시인하고 나오면 어떻게 될까. 한국이 순순히 살점을 떼어줄 때는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았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이명박 정부가 이를 중단하는 바람에 굶주림에 정신이 이상해진 북한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며 책임을 한국 정부에 돌릴 것이다.
북한 설을 부정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10년에 걸친 살점 상납 정책 지지자들일 것이다. 피 흘리면서 떼어준 살점이 어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어떤 이유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증거가 없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 눈에는 은행에서 론을 줄 때 과거 크레딧을 조사하는 것도 차별로 보일 것이다. 과거 돈을 좀 떼어 먹었더라도 어떻게 그것이 앞으로 또 떼어먹을 우려가 있다고 보는 증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그것도 동족이, 갚겠다면 믿어야지 어떻게 인간을 불신한단 말인가.
토끼 마을의 늑대는 더 이상 돼지한테서는 기대할 게 없다고 보고 이웃 팬다 마을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고 한다. 다시 살점을 주고 화해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늑대와 한판 뜨자니 뜯길 살점은 내가 더 많아 보이고, 토끼 마을 돼지의 근심은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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