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불이 난 줄 알았다. 온 산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가까이 가면서 그것이 온통 꽃임을 알게 된다. 남가주 앤틸롭 밸리 파피 보호 구역 말이다. LA에서 5번을 거쳐 14번 프리웨이를 타고 가다 애브뉴 I에서 내려 한참 가면 나타나는 이곳은 해마다 이맘때면 사람들로 북적인다. 4월 중순부터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양귀비꽃을 보기 위해서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남가주의 파피는 4년 주기로 절정을 이룬다. 2004년이 한창이었고 2008년이 그랬다. 이 사이클에 따르면 올해는 원래 별 볼 일 없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때보다 찬란한 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아마 지난 겨울 근래에 드물게 많이 내린 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곳을 여러 차례 찾은 한인들도 이렇게 많은 꽃이 핀 것은 처음 봤다는 사람이 많다.
캘리포니아 파피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것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다. 서양인으로 가주를 처음 발견한 스페인 사람들은 당시만 해도 지천으로 깔려 있던 파피의 매력에 취해 ‘황금의 컵’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18세기 말 이들이 남가주를 찾았을 때 파피가 가장 많이 피었던 곳은 지금은 패사디나, 알타데나, 시에라마드레 등 도시가 돼 버린 란초 산 파스콸 지역이었다. 산에서 바다까지 장장 25마일에 걸친 황금 꽃 행렬을 본 스페인 인들은 이것을 ‘황금의 강’이라고 불렀다.
가주 어디서나 풍성하게 황금빛으로 피어나는 파피는 풍요로운 가주의 상징이었다. 1848년 가주가 멕시코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이는 변하지 않았고 가주 정부는 1903년 이를 ‘주 꽃’으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주에 인구가 몰려들고 도시가 들어서면서 파피 꽃 보기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현재 가주에서 파피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곳은 앤틸롭 밸리 뿐이다. 대부분은 1,800에이커에 달하는 보호구역 중 방문자 센터가 있는 트레일을 잠깐 구경하고 오지만 방문자 센터를 지나 서쪽으로 더 가면 5번 프리웨이를 만날 때까지 넓디넓은 평원에 카펫처럼 깔린 파피의 장관을 맛 볼 수 있다. 파피 사이사이에 핀 골드필드와 크림컵 등 온갖 색깔의 봄꽃과 파란 풀밭, 파릇파릇 나무 위에 돋아나는 새싹들은 과연 이곳이 남가주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파피는 여름 더운 바람이 불 때까지 피지만 구경하기는 지금이 적기다. 5월이 되면 벌써 덥다. 이왕 가려면 아침 일찍 가야 주차하느라 늘어선 긴 줄을 피할 수 있다. 4년 사이클이 맞는다면 다음에 이처럼 흐드러진 파피 꽃 잔치를 보려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하고 올해를 계기로 사이클이 바뀌었다면 4년을 기다려야 한다. 4년 뒤 꼭 핀다는 보장도 없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잡으라’는 말이다. 기회는 왔을 때 잡는 것이 좋다. 이번 주말 특별한 계획이 없는 사람은 앤틸롭 밸리로 가면 그다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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