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음을 명백하게 밝힌 첫 정치적 문서는 미 독립 선언서다. 그러나 인간 평등사상의 뿌리는 깊다.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인간 평등은 이 글을 쓴 토머스 제퍼슨의 개인 생각이 아니라 18세기 당시 유럽을 풍미하던 계몽 철학의 근본이념이다.
그리고 이 사상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스토아 철학자의 사해 동포주의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기독교 사상, 그리고 그 토대가 된 유대교에 뿌리를 박고 있다.
이런 사상이 나타나기 전 문명시대의 인류는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뚜렷이 나뉘어 왕과 귀족, 승려 등 극소수는 절대 다수인 ‘민중’을 착취해 먹고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던 것이 유대의 선지자와 그리스 로마 사상가들에 의해 내 몸이 귀하면 남의 몸도 귀하다는 차원 높은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아직도 종종 망각되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신흥 경제 강국을 자처하는 한국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모든 한민족을 한국인으로 본다. 유엔 인권 헌장이 아니더라도 북한에 살고 있는 주민들도 남한 사람들과 똑 같은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한국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심한 인권 유린을 당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북한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북한을 탈출해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만주를 전전하는 탈북자들에 대해 정부 차원의 대책을 내놓은 적이 없다.
탈북자 가운데 가장 뼈아픈 시련을 당하는 것은 소위 ‘조선 돼지’로 불리는 여성들이다. 단돈 100만원에 팔려 중국 남성에게 넘겨지는 이들 북한 여성들은 온갖 구타와 학대에 시달리다 성적 노리개로 전락해 인간 이하의 삶을 살거나 다시 북한으로 강제 송환돼 강제 수용소에서 짐승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
이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한 ‘북한 인권 법안’이 지난 11일 국회 외교통상위원회를 통과했다. 이 법안은 지난 2005년 당시 김문수 한나라당 의원이 제안했다가 집권당의 반대로 무산된 후 2008년 한나라당이 다수당이 되면서 다시 상정돼 1년여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성사된 것으로 외통부에 북한 인권 대사직 신설, 통일부에 북한 인권 자문위원회 설치, 북한 인권 실태 조사를 위한 북한 인권 재단과 인권 기록 보존소 설치, 통일부의 북한 인권증진 기본계획 수립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안은 민주당 의원들이 모두 퇴장한 가운데 통과됐는데 이 법안에 반대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이유가 걸작이다. 이미 5년 전부터 논의돼 온 법안인데도 아직 충분한 토의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거기다 이런 법안을 만들어봤자 김정일만 자극해 북한 인권을 오히려 악화시킬 뿐이니 김정일이 개과천선할 날을 조용히 기다리자는 것이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가 한창일 때 한국의 민주투사들은 어째서 이처럼 훌륭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지 못 했는지 모르겠다.
2007년 대선 때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한 아무런 정책과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희대의 사기꾼 김경준에 놀아나며 사실무근으로 밝혀진 BBK 스캔들만 노래하다 참패한 후 국회의원 자리가 아쉬워 자신을 대선 후보로 밀어준 민주당을 탈당해 고향에 내려가 당선된 후 다시 들어온 정
동영은 이 법안이 “뉴 라이트 지원 법안”이란 이유로 반대의사를 밝혔다. 뉴 라이트가 하는 일은 아무리 옳아도 지지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김대중 노무현 집권10년의 최대 오점은 민주투사를 자처하던 두 사람이 세계 최악인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입 한번 뻥끗하지 못 했다는 점이다. 이번 북한 인권법안은 민족 역사에 수치로 기록될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한 첫걸음이다.
이 법안 통과가 같은 핏줄인 북한 주민들의 인권 참상을 직시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민경훈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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