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시대’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부터 2005년까지 MBC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이름이다. 한국 드라마는 재미가 있으면 선정적으로 흐르거나 질질 늘려 김을 빼는 것이 보통인데 이 작품은 흥미진진하면서도 한국 근대사를 사실에 가깝게 다뤄 학습 효과까지 있는 명작이다. 그런데 차기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 되던 이명박(극중 이름 박대철)을 너무 띄웠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니 한창 진행 중에 갑자기 중단돼 버렸다. 아쉽기 짝이 없다.
작품의 줄거리는 천태산과 국대호라는 두 인물이 어떻게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기업을 키워냈는가 하는 것인데 이름만 가명이지 실제로는 정주영과 이병철의 이야기라는 것은 보는 사람 누구나 아는 일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잘 살아보겠다고 아버지 돈을 훔쳐 집을 나온 천태산이나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편안히 살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사업에 뛰어든 국대호 모두 보통 인물은 아니다.
출신 성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착상의 비범함과 뚝심, 불굴의 의지가 그것이다. 6.25 피난시절 미군정이 한 겨울에 잔디를 깔라는 오더를 내렸을 때 이를 맡겠다고 나선 것은 천태산뿐이었다. 그는 보리가 눈 속에서도 파란 싹을 피우는데 착안, 잔디 대신 보리를 심었다. 그 후 미군 공사는 모두 천태산의 몫으로 돌아갔고 그것이 그 사업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그는 막노동자 시절부터 벼룩이 피를 뜯기 위해 천장까지 기어 올라가 점프하는 모습에서 끈기를 배웠다. 다리 공사를 하며 홍수가 나 몇 번이나 떠내려가도 굴하지 않는 그의 의지는 여기서 나왔다. 조선 사업에 뛰어들기로 하고 자금 마련을 위해 런던에 달려갔으나 은행가들이 “조각배 하나 만들어본 경험도 없으면서 무슨 조선소냐”고 비웃자 즉석에서 한국 돈을 꺼내 보이며 “우리는 벌써 400년 전에 거북선을 만든 민족”이라며 설득해 결국 돈을 받아냈다.
국대호는 정미소와 양조장으로 사업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것이 당시에는 가장 안전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한국사람 치고 쌀 안 먹고 술 안 먹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일제 말기 전시 체제로 들어가면서 사업은 망하고 빚만 잔뜩 지게 된다. 그래도 도망가지 않고 끝내 이를 모두 갚아낸다.
그 후 6.25가 터지자 전시 특수를 이용, 무역으로 큰돈을 벌지만 이에 만족치 않고 한국도 제조업이 있어야겠다고 판단, 설탕 공장과 직조 공장을 세운다. 한국의 산업화는 이 두 사람의 손으로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드라마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병철은 70년대 말 대다수 사람들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반도체 분야에 사운을 걸기로 결심한다. 물론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평소 친분이 두텁던 일본 회사 중역과 석학들의 자문이 있었다. 처음에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적자만 나 “회사를 모두 들어먹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이병철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던 회사가 나중에는 어떤 삼성 계열사보다 큰돈을 벌게 됐다. 지금 일본 10대 가전제품사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순익을 낸다는 삼성전자가 그 회사다.
한국 전자제품과 자동차가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제보다 좋다는 평을 받게 되리라고는 불과 수년 전까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엄연한 지금의 현실이다. ‘자동차의 바이블’ JD 파워 조사에서 한국 차가 일본 차를 제친지는 오래 됐고 차후 가장 유망한 분야인 LED 고화질 TV 시장의 90%는 삼성 브랜드가 장악하고 있다.
일본 기술자들을 상전 모시듯 하며, 국내에서 ‘매판 자본가’라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아가며 정주영과 이병철이 사업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들에 대한 칭찬보다는 비난이 더 많은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는 12일은 이병철 탄생 100주기다. 이 날을 계기로 한국인들이 그의 공과 과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으면 한다.
민경훈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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