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는 것을 소홀히 할 수도”
▶ 설조 큰스님, 권리 찾으려면 당당하게 외쳐라 강조
이 세상을 전능한 브라만신이 창조하였다는데도 괴로움은 있었고 더욱 왕자로 태어난 싯달타도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두려움을 피할 길을 알 수 없었습니다. 전능한 브라만신이 만든 이 세상에 왜 이런 괴로움이 있는가? 왜? 왜? 싯달타는 왕궁을 떠나 성스럽게 존경받는 여섯분의 선인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으나 해답을 찾을 수 없어 스스로의 정진으로 이 세상은 브라만신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며 누구나 갖고 있는 이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을 바로 이마음을 알면 영원한 평화는 누려지는 것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밝은 문명의 세계에서도 천지를 어느 신이 창조하였고 이 세상 모든 일을 주재한다고 믿는 판에 얼마나 크고 놀라운 발견이었습니까? 부처님은 스스로 창조신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또한 그 대변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눈을 뜬 사람으로 바른 길을 안내하여 누구나 다 같이 영원한 평화를 누리고자 말씀하셨던 것 입니다.
설조 스님의 설교는 간략했지만 왜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공부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짚어주셨다. 낙산사가 있는 양양에서 태어난 스님은 근세 격변기에 적응하지 못하여 허물어져가는 어린 참판댁 손자가 제방에 누워 저 하늘 끝까지 땅을 사고 말거라는 어릴 적 회상을 더듬어 가실 때 어릴적 스님이 되었던 물고를 가늠해본다. 무엇이었을까?
고교때 성경을 공부했지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무조건 의심하지 말고 믿으래요. 그때 공부한 성경의 지식이, 훗날 어느 타 종교인이 33인 용성스님의 딸이라고 속여 큰행사를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사기친 근거를 낱낱이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요. 당시 용성스님은 그 여자분이 태어난 시기에 서슬퍼런 일제치하 함경도 감옥에 있었고 태어난 장소는 이남이었지요.”
이광수의 단종애사, 해탈 같은 책을 읽으며 삶에 많은 의심을 가졌고 낙산사 지나가는 스님께 물으면서 진리를 조금씩 맞보면서 불문에 들으셨단다. 특별한 사건이 없었음이 구도의 길로 들어서는 수행자가 되는 인연은 삼세의 연이었구나! 가까이서 뵈도 스님은 어려웠다.그 어려움은 부처님의 법의 몸이었다. 그 법과 진리의 몸으로 한없이 비폭력을 교육받은 불자들을 위해 싸운 저항의 역사가 있었다.
71년 말 유신직전에 동국대 재단 감사를 맡아 큰 종정 어른들을 모시고 학교를 지켜 나가는데 시대적인 안목만 부드러워 학교와 불교계가 발전하지 않음에 큰 분노를 느끼고 금오 고산 월주 월성 월탄 등 오늘날 큰 스님들이 되신 다른 젊은 수행자들과 함께 행동하는 젊은 피로 정부에 저항했다. 스님이 뼈저리게 느낀 것은 짖지 않는 개는 주인이 밥 주는 것을 소홀한다는 것이다. 스님은 당부하셨다. 비록 남의 나라에 이민와 살지만 우리가 우리 권리를 정당히 찾으려면 용기있게 바르게 외치라고 당부하셨다.
새크라멘토에 선원을 마련해서 설계도를 보니 옆집이 사찰 땅을 많이 침범해있는 거예요.그래서 법정 소송을 들어갔는데, 수년이 걸렸고 결국 우리가 져서 만오천불짜리 싯가의 땅땜에 오십만불의 빚이 졌었죠. 실제의 측량도 옳았고 배심원들도 우리가 옳다고 하였지만 유태인 판사는 끝내 유태인 손을 들어졌죠. 그 전까지 그 사람들의 저항의 역사가 참 좋아 보였는데,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외쳤습니다. 모든것이 사실인데도 진실을 덮어버리는 너희들의 거짓을 어떻게든 밝혀내고 만다고 하였더니 얼굴이 벌개지드라구요. 불자들이 수가 약하다고 거룩한 부처님 믿는 일에 단단함을 잃지 않도록 하세요. 여하튼 송사 때문에 여래사는 샌프란시스코 여래사를 팔아야 했는데 그게 일이 잘되어 산부르노 더 좋은 전당을 마련하여 오늘 이 시간 더 아늑한 자리에서 우리 불자들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합니다.”
80년 10/27법난을 피해 간발의 차이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스님은 도반들의 참혹했던 짓밟음의 신음소리에 가끔 오션비취에서 울음을 삼키시곤 하셨단다. 하지만 그 울음 때문에 서부의 관문에 처음 내리는 우리 불자들은 물어물어 절에 갈 수 있었고 아무 연고도 없는 스님은 주소만 들고 찾아오시며 신도들과 힘을 합해 도와드린다. 몇년만에 한번씩 들리는 해군함정이 오면 부처님 받드는 청년들을 대접하고 북가주 불자들은 여래사를 큰집삼아 많은 행사를 공동으로 치룰 수 있었다. 설조 스님의 행은 불법은 산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속에서 자비를 실천하길 바랐던 근대한국 불교의 선각이었다. <배경순 객원기자>
사진/ 설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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