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년 새해가 힘차게 밝았다.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순간에 선 한인들은 희망과 기대를 한껏 부풀리고 있다. 이 가운데는 보다 큰 꿈을 꾸는 한인들도 있다. 개인이 아닌 한인사회와 지역사회를 위해, 그리고 한인의 명예를 위해 뛰는 이들이다. 2010년을 맞아 남다른 한 해를 준비하는 한인들을 소개한다.
버지니아 첫 한인 하원의원 마크 김씨
“소수계 주민 고충 귀 기울이는 서비스 봉사자로 일하는 한 해”
“2010년은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서비스 봉사자로 일을 할 것입니다”
지난해 11월3일 실시된 총선에서 최초의 한인 주 하원의원으로 버지니아주 한인사에 큰 획을 그은 마크 김(43·민주당) 의원. 2010년 정치계 입문 초년생으로서 향후 도약을 위해 준비하는 한해로 지역 주민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다.
전통적으로 여당이 권력을 갖고 정치적 역량을 펼치는 백인 지역인 버지니아에서 야당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된 만큼 첫 해부터 의욕적으로 다양한 정부사업을 펼치기에는 버거운 면도 있지만, 이를 기회삼아 철저한 준비를 통해 미래의 전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김 의원은 “한인사회에서 보내준 뜨거운 성원과 지지를 통해 정계에 진출하게 되어 우선 큰 감사를 전하고 싶다”며 “하지만 올해는 소수의 야당으로 일을 하는 만큼 의회에 큰 힘을 보태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아웃리치에 초점을 둔 정치활동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버지니아 주민을 위한 사업과 한인사회를 위한 일이 있을 터, 이러한 부분을 잘 파악해서 시민들의 불평에 귀를 기울이는 서비스 봉사자로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자신이 이민자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직접 소수계 등 시민들의 고충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1980년 오렌지카운티로 이민 온 한인 1.5세 김 의원은 UC어바인을 졸업한 뒤 88년 워싱턴 DC에서 민주당 전당위원회 인턴을 통해 정치계에 관심이 생겨, 이를 계기로 헤이스팅스대 로스쿨에 진학했다. 변호사로 일하던 김 의원은 빌 클린턴 대통령 당시 딕 더빈 연방상원의원(일리노이)의 보좌관으로 스카웃되면서 연방의회에 입성했다. 이후 버락 오바마 대통령 후보를 만나 민주당 경선 당시 버지니아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앞장섰다.
그는 지난 선거에서 큰 힘을 얻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한인사회를 위한 노력에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또 정계에 먼저 입문한 선배로서 한인 젊은이들의 도전에 큰 힘을 실어주겠다고 말했다.
웨스트체스터 고교 레오나드 최 교감
“재정위기 이겨낼 변화 시급해 공교육 개선에 최선 다하겠다”
그는 교육행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굳이 이를 숨기지도 않는다. 현재의 공교육 시스템이 위기에 봉착했다는 교육자로서 당연한 위기감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구 교육감, 그리고 연방 교육부 장관이 돼 ‘교육개혁’을 진두지휘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현재 웨스트체스터 고교 레오나드 최(한국명 명진) 교감의 이야기이다. 그의 나이는 이제 갓 30대 중반을 바라본다. 한국으로 치면 교감이란 직책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나이로, 한인 가운데 최연소 교감이다. 하지만 그는 당찬 목표를 갖고 교육에 정열을 쏟고 있다. 그는 교육계의 ‘변화’를 강조한다. 그래야만 공교육의 질적 향상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7년의 평교사 생활 대신 교감이란 무거운 책임을 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컬버 중학교에서 근무할 당시 선배 교사의 격려도 한 몫을 했다.
당시 자신이 지도했던 아이들의 어려운 환경 등을 직접 목격하면서 교사로서의 책임감을 깊이 느끼고,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고, 이 때 선배 교사는 본질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행정 분야 진출이 중요하다고 조언해 준 것이 큰 용기가 됐다. 그리고 자신이 어린 학생들의 롤 모델이 되겠다는 다짐도 하게 됐다. 그는 “그 과정이 내 자신에게도 도전이었다”고 소개했다.
최 교감은 “LA통합교육구는 심각한 재정난에 봉착해 있고, 이로 인해 교육과 교사의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교육의 질이 위협받고 있다”면서 “이를 개선시키기 위한 우리 스스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연방 교육부 등의 책임자들이 교사 및 학생들과 한 몸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미국의 교육이 어려운 입장에 처한 한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인사회에 대해서도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각계 전문가들이 대거 양산되고 있지만, 상호교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금이 한인사회가 상호 유기적인 협조를 통해 발전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강조한 그는 “내 꿈이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 상관없이 LA 통합교육구 학생들의 발전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며 “새해에는 더욱 열심히 공교육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진호 기자>
LA 행콕팍 ‘2가 초등학교’ 교사 한나 임씨
“학생·학교·교육에 대한더 넓은 시각 키우려 공부”
교육은 이민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가장 활발한 원동력이다. 실제로 이민역사가 100년을 넘어선 오늘의 한인사회가 있기까지 한인들의 ‘뜨거운 교육열’이 중요한 한 몫을 차지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겠습니다.”
행콕팍에 있는 ‘3가 초등학교’(교장 수지 오) 듀얼랭기지 프로그램 5학년 담임인 한나 임 교사의 첫 마디다.
그녀는 매주 월요일마다 학교가 끝난 뒤 다시 학교로 향한다. 지난 가을 학기 페퍼다인 대학에서 교육행정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다시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는 것.
지난 2004년 처음 교사가 될 때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꿈인 ‘교장선생님’을 실현하기 위해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가고 있다.
두 살 때 미국에 온 임 교사는 영어 억양이 없는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월넛에서 성장하는 동안 집에서는 늘 한국어를 사용하며 이중언어 능력을 키워갈 수 있도록 지원했고, UC어바인을 졸업한 뒤에는 한국으로 가서 연세대학교에서 한국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LG전자, imbc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국회사에서 해외 마케팅을 담당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나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을 뿐 사회에는 기여하는 바가 없다는 불편함이 있었다.
미국에 있는 지인이 뒤늦게 공부하여 교사가 되어 보람을 느끼는 모습을 보며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워낙에 아이들을 좋아하던 임씨였다. 1년만에 페퍼다인 대학 교육학 석사과정을 끝내고 교사 자격증까지 땄다. 힘들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됐다는 기대감에 재미있게 공부했다.
졸업 직전 LAUSD에 듀얼랭기지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2004년부터 3가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 지난 가을부터는 교육행정학 석사과정을 시작하며 학교와 학생,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 2010년 과정을 모두 끝내고 나면 한층 깊어지고 넓어진 교사가 되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임 교사는 “아이들은 모르는 것을 알게 되면 순간 눈이 ‘반짝’한다. 그 순간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며 활짝 웃었다.
<김동희 기자>
캄튼 청소년 사역 앞장 데니얼 변 목사
“소외된 계층에 희망 심어주는 흑인·라티노 어린이 교회 열어”
올해 31세인 데니얼 변(한국명 성은) 목사.
그에게는 꿈이 있다. 우리 사회 저편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는 물론, 미래조차 불투명해 하는 불우환경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작업의 본격적인 시작을 2010년 새해로 잡고 있다.
‘아름다운 세상’ ‘함께 하는 세상’을 위한 첫 걸음이 바로 꿈나무들을 위한 투자에서 비롯된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는 변 목사는 그래서 남들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캄튼에서 지역사회 단체 및 기관들과 이들을 위한 지원활동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리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2008년 조직한 것이 비영리기관 ‘아우어스’(Ours)이다.
모토는 의외로 간단하다. 진정한 사회의 변화는 내 것과 당신 것이 우리 것이 될 때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 바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있다. 정서적으로 민감한 어린 학생들에게 환경은 무척 중요하다. 극빈층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그 틀에서 벗어나기가 정말 어렵다. 말 그대로 ‘악순환’이다.
변 목사는 이를 끊어버리기 위해, 그리고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바로 커뮤니티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공유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여기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끌어 들이면 상당한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변 목사는 강조했다. 예를 들어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지만, 매년 찾아가지 않는 옷을 아이들을 위해 도네이션 할 수 있고, 교계 역시 다양한 지원활동이 가능하다. 이처럼 각계 기관이 힘을 모으고, 유기적인 지원관계를 형성하면, 훨씬 효과적인 지원이 가능해진다.
변 목사는 우선 올해 캄튼 지역의 3개 고등학교를 빌려 ‘어린이 교회’를 시작할 예정이다. 주요 타겟은 지역의 주류인 흑인과 라틴계 학생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밀알이 돼 지역을 넓혀 가길 원한다. 변 목사는 “이 사업은 바로 긍정적, 발전적 측면의 커뮤니티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며 “어린이와 청소년 문제는 지구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제 한인사회도 이 같은 문제에 주도적인 해결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며 “작은 부분이라도 함께 참여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황성락 기자>
노조 경제개발 디렉터 존 최씨
“한인 2세 정치적 목소리 모아 커뮤니티 취약점 고쳐 나갈 것”
존 최씨(29)는 ‘노조’라는 단어가 주는 강경한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는 부드러운 느낌의 남자다. 하지만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노조에 대한 열정과 한인들의 정치력 신장에 대한 고민으로 똘똘 뭉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새해 한인사회가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큰 이유이다.
지난해 UCLA 법대를 졸업한 그는 유명 로펌의 스카우트 제의를 뒤로하고 LA카운티 노조연합 경제개발 디렉터로 일터를 정했다. 자신의 삶의 지표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치과의사 아버지, 서니힐스 고등학교와 UCLA 졸업 등 오렌지카운티 출신의 전형적인 중상류층 교포였어요. 하지만 대학생 때 한인타운을 자주 찾으면서 한인 커뮤니티의 정치·경제적 취약점을 느꼈고 서서히 한인 정체성과 정치력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LA시의회 10지구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아버지께 아들이 의대나 치대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간접적으로 알려드렸지요.”(웃음)
노조의 경제개발 디렉터인 최씨의 업무는 LA지역 정부의 정책이 노조와 중산층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보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최씨는 “현재 LA에서 진행중인 대중교통과 중산층 주택 확충 프로젝트에서 노조 일자리를 확보하고 이런 공공 프로젝트가 중산층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LA지역의 정치인에게 노조의 정치적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도 나의 일(job)”이라고 설명했다. 최씨는 “노조는 빈곤층이 직업을 통해 중산층으로 진입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스스로를 ‘정치 기술자’라고 부르는 최씨는 한인 차세대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집결시키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법대에 진학하기 전까지 LA시의회 10지구와 LA시장실 보좌관으로 재직하며 한인타운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한인 정치력의 한계와 가능성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한인들의 ‘정치적 근육’(political muscle)을 강하게 하는데 힘을 보태고 싶다”며 한인 정치력을 속속들이 진단하는 그의 말에서 한인 차세대 정치력의 큰 축을 담당하게 될 리더십이 보였다. 최씨의 친절한 웃음 속에서 ‘벨벳 장갑 안에 강철 같은 손을 갖고 있다’는 미래의 ‘외유내강형’ 정치 리더를 만날 수 있었다.
<김연신 기자>
여성의류 ‘벤소니’로 패션계 주목 디자이너 소니아 윤씨
“한국과 미국 문화 공존 독창적 패션 기대하세요”
“이른바 명품 브랜드는 일반인이 구입하기에 부담스럽죠. 명품의 대안이 되는 것이 신진 디자이너의 하이 컨템포러리 브랜드입니다. 명품 옷 절반 가격이면 젊고 재능 있는 디자이너의 개성 넘치는 옷을 구입할 수 있거든요. 이것이 벤소니의 인기 요인입니다”
한인 디자이너 소니아 윤씨가 파슨스 스쿨 동창 벤자민 클라이번과 함께 런칭한 여성의류 브랜드 ‘벤소니’의 기세가 무섭다. 2007년 첫 선을 보이자마자 팝스타 제니퍼 로페즈와 아이돌스타 레이첼 빌슨 등 할리웃 패셔니스타들이 입은 사진이 파파라치에 포착되면서 ‘일부 품목 완판’을 기록했고, 이듬해 2009년 뉴욕 패션위크에 데뷔하면서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당시 뉴욕 패션계는 “문화적 배경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일으키는 스파크가 아름답고도 강렬하다”고 호평했다.
한국과 미국이라는 문화적 충돌을 적절히 융화시키고 상반된 두 사람의 기질이 편향되지 않는 절제된 디자인으로 창조되어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다. 2010년 뉴욕 패션위크의 평가도 다르지 않았다. 아메리칸 팝 컬처를 차용한 컬렉션 ‘아메리콘’(AmerIcon)을 선보여 미국 패션의 진부함을 벗은 독창적이고 신선한 스타일로 주목을 받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자란 소니아 윤씨는 뉴욕의 명문 파슨스 스쿨 오브 디자인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 파슨스 재학 시절 고급 백화점인 삭스 피프스가 실시한 유니폼 공모전에 당선되는 등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서울, 런던, 뉴욕에서의 삶은 그녀에게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토대로 한 코스모폴리탄 스타일을 창조시켰고, 영국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과 코번트 가든에서 보낸 10대 시절은 그녀에게 스트릿 패션을 주시하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대학 신입생 때부터 친분을 쌓아온 볼티모어 출신의 전형적인 미국인 벤자민은 좋은 친구이자 경쟁 상대였다. 건축가를 희망했지만 패션에 매료되어 파슨스로 전학해 온 벤자민은 그녀에게 신선한 자극이었다.
졸업 작품전을 함께 준비하며 서로 훌륭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는 그녀는 “동양과 서양, 창의성과 전통, 여성미와 남성미 등 너무나 상반된 두 가지 요소가 공존하는 컬렉션”이라며 “최근 다니요(Dannijo)와 함께 주얼리 라인을 런칭했는데 1960년대 스타일의 오버사이즈 귀걸이와 포크 아트 별 반지 등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밝혔다.
<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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