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구호 활동으로 가장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 구세군 자선냄비다. 그 유래는 1891년 샌프란시스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성탄절 즈음 샌프란시스코 부둣가는 조난 선원들과 굶주린 빈민들로 넘쳐났다. 조셉 맥피라는 구세군 사관이 이들을 도울 방도를 궁리하다가 큰 솥을 거리에 걸어놓고 그 위에 ‘이 솥을 끓게 합시다’라는 문구를 붙였다고 한다.
이 아이디어는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 곧 부둣가의 빈민들 모두에게 따뜻한 성탄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돈이 모였고, 이것이 지금 구세군 자선냄비의 효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양에서 유래된 구세군 자선냄비가 있다면 한국에는 예로부터 구휼미가 있었다. 재난이나 흉년으로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구제를 위해 조정이나 관아에서 비축 쌀을 풀었다. 얼마 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구휼미 이야기가 나왔던 것을 보면 위급 시 쌀을 나누어 굶주림을 면케 하는 전통은 삼국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선조 들어 민간 구휼의 대표적 예로는 정조 때 제주 ‘만덕 할망’ 이야기가 있다. 제주 의녀 김만덕은 객주를 운영하며 무역업으로 큰돈을 번 여성 거상이었다. 당시 제주도에 수년 째 극심한 흉년이 들었는데 조정의 구휼미를 실은 배마저 도중에 난파당하자 김만덕이 사재를 털어 산 쌀로 수천명의 주민들을 기근에서 살려냈다는 스토리다.
올해 한국에서는 이러한 김만덕의 정신을 기려 기부 받은 쌀을 쌓아올린 뒤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는 ‘나눔 쌀 만 섬 쌓기’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쌀 나눔 운동이 올 연말 이곳 남가주에서도 펼쳐진 것은 한인 이민사회의 새로운 전통의 시작으로 기록될 만하다. 본보와 한인 교계 및 총영사관 등이 공동으로 전개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은 일방적인 구휼이 아닌 십시일반의 나눔의 방식이어서 의미를 더했다.
골이 깊은 경기침체 분위기 속에서도 1만포가 훌쩍 넘는 분량의 정성을 모았으니 쌀을 나눈다는 게 우리의 정서에 딱 들어맞았던 것 같다. 개신교계가 실무에 주 역할을 했지만 불교와 가톨릭, 원불교 등 참여에 있어 종교와 교파의 구분을 넘어선 것도 뜻 깊은 일이었다.
쌀 배부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밝았다. 지금 세상에 밥을 아예 굶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쌀 한 포의 묵직한 느낌이 연말에 왠지 더욱 허전한 가슴 한 구석을 메워줬을 법하다. 한인들 뿐 아니라 히스패닉 이웃들도 “쌀을 매일 먹는데 나누어주니 고맙다”며 댕큐를 연발했다.
경기침체로 미국 내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액이 작년보다 9% 정도 줄어들 전망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액수는 줄었을지 몰라도 ‘딸랑딸랑’ 사랑의 종을 울리는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은 여전했고, 냄비 안에 기부금을 넣는 따스한 마음의 온도차도 없었을 것이다. 어려울수록 나눔의 마음, 마음의 나눔을 더 크게 가질 수 있기를... 2009년 세밑에 가져보는 소망이다.
김종하 / 사회부 부장대우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