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그 무엇이든, ‘이 생명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하고, 믿고 또 믿어’본 적이 있는가. 평생에 단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그렇다, 라고 대답 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거나 매우 특별한 사람일 것이다.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죽으려 작정을 하고 벼랑끝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굴러내려왔다. 그 사람은 그것을 얼른 피했다고 한다. 죽으려던 사람이라도 위험 앞에서는 몸을 피하게 되어있는 것, 그것이 바로 모든 생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따라서 목숨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거의 없다. 그것이 비록 꿈에 그리던 사랑일지라도 말이다. 절대적이라는 자식 사랑에도 자식이 너무 속을 썩이면 그 마음이 식는다. 어쨌든 생을 지향하는 모든 존재들은 내 생명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 있기는 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 같은 성자들이다. 그들은 많은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 사랑을 실천하였다. 죽음의 문전에 단 한번이라도 갔다 온 사람은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 것이다. 그 중대한 것을 바쳤기에, 우리는 성자들을 존경하며 따르겠노라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가의 ‘至心歸命禮’ 이다. 부처님을 향해 올리는, ‘온 마음과 목숨을 다해 믿고 따르겠노’라는 서약이다. 사람들은 절에서 ‘지심귀명례’를 염송하며 예불을 올린다. 과연 그들은 정말로 온 마음으로 부처님을 믿는 것일까. 과거에는 부처님 전에 쌀을 이고 천리길을 가면서도 단 한번도 그 쌀을 머리 위해서 내려놓지 않았던, 그런 순정적이고 지극한 믿음이 있었다. 그런 이들을 보면 눈물겹다. 요즘은 그런 사람들을 보기 힘들다. 종교에 거는 마음이 그리 절절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선택한 종교를 버리고 돌아서는 일에도 별로 힘들어하지 않는다. 마치 몇 번 만나지 않은 사람과의 이별을 감행하듯이 조금만 맘에 안들어도 돌아선다. 하지만 부처님의 곁은 몇번의 만남으로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니다. 부처님의 반의 반 만이라도 수행을 하지 않고는 그 곁에 가까이 갈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종교가 조금이라도 힘든 것을 요구하면 . 함을레이h부담스러워 한다. 아다시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요구는 부담스럽다. 종교가 부담스럽다면 그것은 내가 그 종교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고 또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자신의 선택이다. 내가 선택한 그 무언가에 최선을 다하는 것, 정말 멋진 일이 아니겠는가. 이 전정성의 생명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했다면, 비록 돌아설지라도 원은 없지 않겠는가. 맘껏 해보지도 않고 흐지부지, 그러고 나서 종교인이었다 말할 자격이 있겠는가. 지심으로 사랑했다면, ‘미워도 다시 한번 안녕’ 해줄 수 있는 그런 여유도 생길 것이다. 종교는 인생에 있어서 방편이지 절대로 목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걸 바쳐 진정으로 사랑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 부처님에 대하여, 그런 절절함을, 그런 뜨거운 순정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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