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뒹굴고 고운 물이 든 단풍잎들이 바람에 쏟아져 내린 가을 길을 걸어본다. 기나긴 여름이 지나고 이제 가을인가 싶었는데 나무들은 추운 밤 사이 잎사귀들을 떨구어내고, 다가올 또 한번의 겨울을 겸허히 견딜 모양새다. 천천히 걷던 길을 멈추고 잎이 져버린 나무들을 바라보면 앙상한 나뭇가지에 쓸쓸하게 걸려있는 빈 새둥지를 만나고는 한다.
나도 그런 빈 집 하나 내 안에 수도 없이 지었다 허물면서 살았던거 같다. 살아가는게 갈피를 잡을 수 없고, 마음은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듯 싶은 날이면 나는 사람들이 모르는 나만의 빈 집에 숨어 들고는 했다. 내 안의 그 집은 어느 날은 마루도 벽도 허물어져 바람이 불면 방에서도 차가운 웃풍을 느끼기도 했고, 금 간 벽틈새로 비가 새고 눈이 들이치는 날도 있었다. 또, 어느 날 그 집은 단단한 마루와 지붕을 얹고 있었다.
나는 먼 길을 떠났다가 지친 다리로 대문을 밀고 아무도 없는 집으로 들어 와 뽀얀 먼지가 앉은 마루에 오래도록 주저앉아 있고는 했다. 집 마루 귀퉁이에는 뉘엿뉘엿 져가는 하루 석양 해를 바라보며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누군가를 혼자 기다리는 어린 아이가 있기도 했고, 잊을만하면 어느 이름모를 여자가 그 집 작은방으로 들어와 며칠을 울다 말없이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눈이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처녀적 봄나들이 갈 때 신었던 예쁜 꽃신이 디딤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기도 했었다.
때 되면 부엌에서 쌀을 씻고 밥을 안쳤지만 마음 허전할 때면 나는 그 집에서 한숨을 쉬었었고, 허공을 바라보거나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는 날들이 많았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온 어느 날의 세상 풍경은 맑았고, 또 어느 날은 흐린 하늘이 가득 들어차기도 했었다. 내 안의 빈 집으로 들어오는 풍경은 그렇게 매 순간 바뀌었고, 그때마다 나는 무언가로 채워졌다 다시 비워지고는 했다.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문태준)
올 가을 다시 꺼내 읽어 본 이 시는 참 반갑게 나에게 들어온다. 독을 품은 독사와 너른 청보리밭, 눈보라, 전나무 숲, 그리고 지옥과 천국도 모두 빈 집 같은 나의 마음 속에 들어 앉았다 나가고는 했었나 보다.
몇 번의 가을을 지나야 세상사의 모든 것들로부터 초연해져서, 때로는 커다란 전나무 숲의 울창한 고요를 내 안으로 들이기도 하고, 또 잔혹한 말들과 눈물로도 나의 마음이 기꺼이 메워질 수 있을까? 얼만큼 나를 비워내면 큰 침묵으로 세월을 견디어 낸 미륵의 자비로운 미소를 지닐 수 있을까? 대나무가 열매 맺지 않듯이, 그냥 풍경을 들어 앉히는 착한 사진사가 되어 마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사랑하라고, 그리고 마음을 놓아주라고……시인은 이 가을날 나에게 이야기한다. 빈 집의 약속을 믿고 싶은, 채우기 보다는 덜어내고 비우고 싶은 가을이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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