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에서 연락이 왔다. NBC에서 트라우마라는 드라마를 찍는데 배경에다 내 그림을 걸겠다고 빌려갔단다. 갑자기 테레베존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라는 애들 노래가 있다던데 생각이 나서 웃었다. 그 그림은 그동안 계속 렌트로 나가서 본전보다 더 돈을 벌어다 준 그림인데 이제는 티브이에까지 나온다니 정말 효자다. 그림이란 게 완성이 될때까지는 내 손안에 있지만 일단 완성이 되면 자신만의 운명이 있어 그 운명을 따라 가는 것 같다. 팔자가 좋아 좋은 자리로 시집을 가서 오래동안 많은 사람의 시선과 사랑을 받는 그림이 있고 좋은 그림인데도 임자가 없어 어둠속에서 조용히 세월만 보내고 있는 그림도 있다.
사람의 운명도 그런것 같다.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좋은 환경에서 사랑받고 자란 사람도 있고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사랑은 커녕 온갖 상처를 받고 고생을 하며 크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청,장년기가 되면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발휘해 힘껏 뛰며 또 운도 따라주기를 바라는 시기가 된다. 자신의 두발로 서서 열심히 야망껏, 의욕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 시절에 아무리 실력이 있고 노력을 해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잘살기 힘들고 또 아무리 운이 따른다해도 본인이 그 운을 거머쥘 실력과 노력이 없으면 도루묵이다. 그렇게 온몸으로 한세월 살다보면 어느새 노년, 잠시 돌아보면 또래들중 어느새 타계한 이들도 있고 병마에 시달리는 이도 있고 어린 자식들을 먼저 보낸 이도 있으며 배우자와 헤어져 혼자가 된이도 있다. 나만은 결코 늙지도, 죽지도 않을 것으로 생각하며 산 세월이 손아귀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허망해 지는 시절이다.
이제 앞으로 남은 세월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남들은 늙으면 실버타운으로 이사를 간다는 둥 하는데 나는 떠나기가 싫다. 미국에 와서 학교에 다니던 이년을 빼곤 쭉 이 동네에 살았어서 산호세는 내 인생의 제이의 고향인데다 그 긴 세월간 알고 지낸 이웃이 전부 이 곳에 있어 다른 곳에 가봐야 무슨 낙이 있을까 싶다.
티브이 드라마에 ‘너는 내 운명’이라는 게 있었다. 그 제목을 보며 참 잘도 갖다 붙였다고 웃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뿐만이 아니고 사람이 오랜 세월 가까이 지내는 것도 운명인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세월을 어떤 이웃과 지내게 될까 생각해 본다.
사람마다 사람을 좋아하는 기준이 다르겠지만 나는 우선 말귀를 알아듣고 말이 통하는 사람과 사귀고 싶다. 수년전이다. L.A.에서 어떤 사기꾼이 사기를 엄청 치고다녀 피해자가 많이 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씨니컬하게 ‘난 놈이네.’하고 한마디 코멘트를 했는데 내 맞은 쪽에 앉은 처음 보는 여자가 갑자기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며 ‘그게 나쁜 놈이지 어떻게 난 놈예요?’하고 바락바락 덤벼서 학을 뗀 적이 있다. 나는 세상에 살다살다 이렇게 꼭 막힌 여자는 첨 보는 구나 하면서 병신시늉까지 해가며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하고 빌었다. 내 딴에는 그 비는 것도 빈정거리는 건데 그 여자는 끝까지 기세가 등등했다. 나는 그 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도 나를 몹시 슬프게 하는 일이 된다는 걸 또 다시 깨달았다.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과의 시간은 낭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귀가 밝을 때는 박식함과 통찰력은 필수일 것이다.
나는 또 삶의 멋을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 급하게 취하고 싶을 때는 소주를 병채 나발 부는 일이 있더라해도 멋으로 마시고 싶을 때는 넣을 것 하나도 빼뜨리지않고 정성을 쏟아 고루고루 넣어 칵테일을 만들어 체리에다 우산까지 펴서 끼워놓고 음악을 들으며 마실 수 있는 멋을 좋아한다. 마찬가지로 반바지에 티셔츠 운동화가 편하지만 어떤 땐 평소에 못입는 화려한 옷에 목걸이 귀걸이 주렁주렁 걸고 찍어바르고 모자까지 쓸 수 있는 사람이 좋다. 그리고 이 모든 근저에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어 따스하고 관대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 좋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느라 한푼도 아까와 벌벌 떨며 생색이 나지 않으면 결코 돈한푼 내놓지 않는 이들과는 아까운 시간 함께하며 낭비하고 싶지 않다.
돌아보니 내가 가까이 지내는 이들은 거의 다 내가 좋아하는 조건에 드는 이들이다.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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