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폭풍 전야같이 거세게 불어대는 바람. 여름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7월 중순의 어느 날 - 나는 서울 한복판에 서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볕 아래 서 있었다는 것이 무색하리만치 그렇게 금새 이곳, 한국에 ‘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아이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관찰자’의 경험이나 태도, 의도, 인식 정도의 따라 때론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으로 변질된다.
십년 전 일이 엊그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일주일 전의 일이 까마득한 오래전 기억처럼 가물가물하기도 하다. 일주일째 머물고 있는 지금 이 공간마저도 금새 익숙해져 낯설지 않고, LA의 나의 집은 어느새 오랜 기억 속으로 묻혀버린다.
미국에서의 6년.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았음에도 한국에 돌아오면 항상 꿈같이 느껴지는 시간이다. 그 아득해지는 기분은 비단 물리적 거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너무나 다른 두 곳의 생활과 환경,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존재감의 차이. 그래서 내겐 두 개의 다른 세상이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 전반에 통용되는 낯설게 하기 기법처럼 일상의 틀에서 벗어난 나를 바라보는 일은, 어쩌면 더 본래의 나, 본질의 나와 조우하게 만들기도 한다. 동시에 이러한 부유(浮遊)감은 어딘가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처럼 위태위태한 모습의 나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지난 며칠간 이곳저곳 내게 익숙했던 공간들을 돌아보니 많이 변해 있었다. 삼청동의 한적했던 거리는 화려한 레스토랑이 즐비한 거리로 변해 있었고, 이태원 골목골목의 카페와 바, 레스토랑들은 ??? 다운타운이나 뉴욕 맨해튼의 한 골목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전에 없던 자동차 전용도로도 낯설고, 일반 택시 요금을 신용카드로 계산할 수 있다는 것도 새롭다.
익숙함 속의 작은 변화들처럼 조금은 새롭고 또 흥미롭다. 이러한 변화들을 거부감이 아닌 흥미로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이곳이 나의 ‘집’이란 생각 때문일 것이다. 나고 자란 곳. 그렇게 나의 삶이 시작된 곳. 생활의 익숙함에서 오는 안정감과는 다른, 깊은 편안함이 배어 있다. 그래서 일이년이 지나면 기어코 와 봐야 하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긴 휴가를 내고 멕시코 칸쿤에서 보내는 휴식과는 다른 휴식. 올해도 내겐 그런 휴식이 필요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의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렇다고 삶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졌다거나 맘을 짓누르던 고민들에 대한 답이 떠오르는 건 아니다. 돌아가면 또다시 변함없는 LA에서의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리고 다시 이곳의 시간을 아득히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와 한 발짝 떨어져 나를 바라보는 시간은 내게 일상 못지않게 중요한 순간들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가족들. 그리고 그들과 나누는 소소한 살아가는 얘기들. 두런두런 때로는 소란스럽게. 멀리서는 결코 나누게 되지 않는 그런 사소한 얘기들이 어쩌면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우리네 삶의 얘기들이다. 삶에서의 단절감은 그런 하루하루의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게 아닐까. 거창한 듯 보이는 삶의 이상과 목표, 가치 등등의 형이상학적 의제들은 결국 그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 걸러지는 결과물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서일까...조금은 숨쉬기가 수월해진 기분이다.
일주일 후면 LA로 돌아간다. 여전히 내겐 한국은 ‘돌아오는’ 곳이고, 미국은 ‘돌아가는’ 곳이다. 십년 이십년을 더 미국에서 살아도 바뀌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김진아 / 캠벨 이웰드 시장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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