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생긴 일이다. 첫날부터 어떤 이상한 남학생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시비를 걸어 왔다. 그러더니 그 후로는 장소가 어디건 나만 보면 잘됐다고 쫓아와 갖은 소리로 못살게 굴었다. 나는 그 학생을 똑바로 쳐다본 적도 없어서 그의 얼굴도 잘 모르는데 교정에서는 물론이요, 분식집이건 다방이건, 아니 사람이 많은 곳에서 부딪치게 되면 더 잘됐다고 시비를 거는데 너무 무섭고 싫어서 매일 아침 학교로 나서는 발길이 돌덩이같이 무거웠다. 좋아서 쫒아 다니는 것은 물론 아니오, 어떻게 해서든지 찔러보고 밟아보고 망신 주는 게 목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어느 동아리 모임에 갔는데 처음 보는 남학생이 나를 보는 순간 얼굴색이 달라지더니 내가 어떤 남학생과 사람 많은데서 실랑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서 싸늘한 경멸의 눈길을 주어서 너무나 당황하고 또 놀랐었다.
나는 분명히 피해자인데 남의 눈에는 그저 사람 많은데서 수선을 피는 웃기는 여자로 보인다는 것을 깨닫고 기절하게 놀랐었다. 그 때 느꼈던 절망감이란! 어느 누구에게 변명 한 마디 할 길이 없이, 내가 자청해서 저지른 일도 아닌 일로, 아니 오히려 동정을 받아도 모자란 일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경멸 받아 마땅한 여자가 될 수도 있는 거구나 싶어 너무나 분했었다. 이즈음의 미국 같으면 법원에서 접근 금지 명령이라도 받을 수 있었으련만.
그런 후에도 그 치한 같던 남학생의 횡포는 계속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등교하자마자 또 그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루고 있는데 마침 연극반 선배가 지나가기에 다급하게 도움을 청했다. 그 선배는 그 치한을 길옆으로 데려가더니 무어라 몇 마디한 후, 심상한 얼굴로 내게 가자고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그 이후로 그 치한이 나를 봐도 시비를 걸지 않고 그냥 슬그머니 지나쳐버리는 것 이었다.
마치 헷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불량배의 협박으로 곤궁한 처지인 싱클레어를 구해준 데미안처럼 한 마디로 그를 떼 내어 준 그 선배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그 선배가 무슨 말로 그를 견제할 수 있었는지 정말 궁금했다. (그 선배는 나중에 내 동창과 결혼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슨 모임 끝에 그 선배가 나를 쌀쌀맞은 눈으로 째려보면서 하는 말이, ‘노상에서 남학생하고 실랑이나 하고...쯧쯧쯧.’ 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나를 도와준 것은 내 입장을 이해해 내 편이 되어준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그 사건은 단지 우연히 벌어진 싸나이 끼리의 기 싸움 같은 것이었나 보았다. 인간에 대한 환멸이랄까, 배신감이 칼로 슴뻑 베이는 것처럼 아팠다.
되돌아보면 아마도 그 일은 그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이 갖던 남성우월주의 한 작태였으리라 생각된다. 무경우의 그 남학생도 세월의 어디 쯤 해서는 누군가를 만나 한 여자의 하늘같은 남편이 되고 어쩜 예쁜 딸내미를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남편과 아빠가 되어 있을까?
그 때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이즈음, 무명의 힘없는 배우로 강요된 성상납과 술시중에 항거해 죽은 장자연의 사건이 이대로 어물쩍 넘어 가는 것 같다. 힘 있고 빽 있는 남자들은 별것도 아닌 게 사람 귀찮게 군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한국에서의 여자의 길은 얼마나 더 먼 것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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