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살, 이대로 바라보기만 할 것인가? (2)
성경에도 자살자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반정세력을 두려워하여 성문 밖으로 몸을 던져 투신자살의 예를 보인 아달랴, 스스로 칼에 엎드려져 아말렉 출신 병사에게 목이 잘린 사울은 변형된 할복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해 목매어 죽음으로 도피처를 구했습니다. 압살롬의 모반에 깊이 관여했던 모사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략이 채택되지 않자 사직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목매어 죽었습니다. 자살은 두려움과 죗값을 치를 마음의 준비를 갖추지 못하기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자살을 죄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또는 누군가를 모방하여 자살하려 든다면 이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 것입니다. 시류에 편승하여 교묘한 말장난으로 자살의 죄를 희석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일찌감치 포기해야 합니다. 모두가 침묵해도 교회는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엄연한 뜻을 밝히 보여야 합니다. 설령 자살은 죄가 아니라는 점을 신학적으로 완벽하게 정리를 하고 논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은 아닙니다. 성경이나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결코 자살의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자살은 악령에 사로잡힌 결과입니다. 생명의 주권을 지니신 하나님께 대항하는 인본주의의 망동입니다. 생명은 그 누구도 해할 수 없습니다. 한낱 미물이나 길가에 피어난 잡초 하나의 생명도 귀하게 여겨야 한다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가는 두말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자살은 삶을 포기하는 나약함과 두려운 현실을 회피하려는 비겁자의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자살자의 영혼에는 아무런 빛도 없습니다. 자살자를 위한 진혼곡은 허공에 퍼질 뿐입니다. 자살자의 시신 앞에서 통곡하는 성직자의 정체가 궁금하고 다양한 의식으로 장례식을 주관하는 종교인들의 허깨비 같은 작태에는 실소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순교에는 자살자의 영혼이 자리할 틈이 없습니다. 순교자의 면류관은 자살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교도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사잣밥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신자가 있다 하여 그들을 순교자로 추앙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달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지닌 권능이라면 죽음 직전에 고통을 피하는 방법으로 무통의 자살법을 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스데반도, 주님의 제자들도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언제나 순교자의 죽음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죽임을 당하는 것과 스스로 죽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자살자의 영혼을 미화하는 것은 왜곡된 종교이념으로 전락해버린 이슬람세력의 자살특공대와 진배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살아있음으로 해서 아름답고 고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끝까지 다하는 죽음만이 그 죽음을 생명의 누이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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