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은 결혼 기념일이었다. 일상이 늘 정신없이 바빠서 그런지 날짜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잘 모르겠고,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생활이다 보니 어느 때는 머릿속이 그저 뿌연게 치매기 마저 있어서, 그 날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나는 오후 늦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수첩에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회사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고 알려주었다. 나의 말에 남편은 전화기를 통해 “그래?” 하며 반가운 듯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이내 “누구네?” 하며 묻는 것이었다. 역시 남편이었다.
결혼 전에는 미국에서 생일 선물이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소포로 보내주어 나를 감동시켰던 남편은 결혼 후, 생일 선물을 자기 손으로 골라 나에게 건네주는건 십년 가뭄에 콩나듯 드문 일이고, 나의 선물을 사러 같이 상점에 갈 때는 마치 도살장에 억지로 끌려가는 소 같은 모습을 해마다 연출한다. 내가 네 인생의 선물인데, 왜 굳이 다른 선물이 필요하냐고 반문하면서 말이다.
살아가면서 깍인 점수를 다시 만회할 수 있는 아내 생일과 결혼 기념일, 일년에 딱 두 번뿐인 이 기회를 매번 놓치고, 인생 힘들게 사는 남편은 14년이나 나와 같이 살았어도 여전히 발전이 없다. 어디 그뿐인가? 남편을 교육시키기 위해, 다른 집 남편들이 아내의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에 아내에게 어떻게, 얼마나 잘하는지 이야기를 하면 묵묵히 들은 남편은, “그 남자, 와이프한테 뭐 죄 지은거 있나?” 하면서 오히려 궁금해한다. 이러니 마치 소 귀에 경 읽기 처럼, 남편은 도무지 학습이 되질 않는다. 대신, 어릴 적부터 내 생일이나 기념일이면 코스코에 가자고 해서 나의 선물을 사준 후, 영수증을 남편에게 내미는 아들을 보며 다소 위안을 삼고는 한다.
내가 아무리 하루 밥 세끼 걱정을 해야하고, 이제는 꿈 속에서도 부엌에서 마늘을 까고 있는 무수리 신세로 살아가지만, 결혼기념일 만큼은 지지고 볶으며 밥상을 차리고 싶지 않았었다. 피곤하다며 밖에 나가 밥 먹기 싫고 집에서 저녁 먹고 싶다며 징징대는 아이들에게 오늘은 엄마 아빠 결혼한 기념일이라며, 남편과 만나기로 약속한 동네 쇼핑몰 근처 음식점으로 향했다.
“엄마, 오늘 결혼기념일이면 둘이서만 어디 비싼 레스토랑 가야 하는거 아냐?” 아들은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나에게 이렇게 묻지만, 어린 아이 둘을 딱히 맡길 곳도 없는 미국생활에서 저녁 먹자고 평일날 퇴근으로 복잡한 고속도로를 운전해서 나갈 여력이 나에게는 없다. 남편이 회사에서 도착했고, 주문한 음식들이 나와서 이런 저런 즐거운 이야기들을 나누며 맛있게 음식들을 거의 비울 때 즈음, 나는 나의 접시 위 음식에 섞인 굵고 짧은 검은색 곱슬머리를 발견하고 경악을 했다. 동네에서 맛있는 집으로 알려진 꽤 크고 깨끗한 곳이었는데, 그 머리카락은 나에게 ‘호세’라는 이름을 지닌 30대 중반의 멕시칸 남자 요리사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웨이터는 미안하다며 영수증에서 그 음식값을 빼주었지만, 아이들은 “그것 봐. 엄마, 그냥 집에서 먹자니까…..” 하면서 내가 만든 음식들이 더 맛있다는 아부 섞인 말도 잊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노을이 지는 바다가 보이는 멋진 레스토랑 창가에서, 은은한 촛불을 앞에 놓고 둘이 와인을 마시며 남편이 아내에게 선물 상자를 내밀면서 결혼기념일을 우아하게 맞던데……대체 나에게는 꿈과 현실의 괴리감이 왜 이리도 큰지 모르겠다.
음식이 조금 짰었는지, 아니면 조미료 때문이었는지, 집에 와서 밤 늦게까지 물만 자꾸 들이켰던 나는 다음날 아침에 얼굴이 보름달처럼 커다랗게 부어 있었다. 해마다 기념일을 잊어버려도 그래도 같이 기념일을 보낼 남편이 나의 곁에 있음을, 비록 동네 음식점이지만, 요즘같은 경제한파에 외식을 하며 살 수 있는게 어디냐고,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며 마음을 다스려야했던, 음식점 MSG와 소금, 주방장의 머리카락으로 얼룩졌던 나의 결혼 기념일이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