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한 방에 달라질 수 있는데 묘미가 있다. 9회말 2사후라도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이 모두 계산대로 뻔하게 흘러가는 것이라면 인생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웅이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핀치에서 역전 홈런을 쳐내는 자들을 우리는 흔히 영웅이라 부른다. 일개 포병 장교에서 황제의 지위까지 오른 나폴레옹…, 물과 13척의 군함으로 백 척이 넘는 왜구를 물리친 이순신 장군… 모두 특별한 힘을 가진 영웅들이다. 영웅은 어느 정도 타고나는 법이지만 역경에서 영웅본색은 드러난다. 귀가 먹어가는 역경 속에서 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이라는 작품을 구상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나폴레옹’이라는 정치적 영웅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었지만 결코 평범치 않다. 즉 단순한 구상, 단순한 소나타 형식으로 그린 교향곡이 아니라는 뜻이다. 모든 것이 영웅적인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전까지는 없었던 대담한 구상… 작곡가의 기호나 개성, 달콤한 선율에의 유혹을 물리치고 절대음악으로서만 영웅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베토벤은 정치적으로 공화주의자였는데 나폴레옹이란 자가 등장, 프랑스 왕정정치를 종식시키고 공화정을 수립하자 열광했다. 인류의 이상이라고나할까, 플라톤의 국가론 등에 심취해 있던 베토벤으로서는 영웅 나폴레옹이 그 이상국가를 설립하고, 이 땅 위에 자유와 평화의 공화정을 도래시킬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전의 왕들보다도 더 지독한 정치적 야망을 가진 폭군이었다. 베토벤은 결국 펜대를 던지고 말았지만 그가 남긴 작품만큼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베토벤을 위대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참으로 맨숭맨숭한… 한 소절 한 소절이 지독한 도전일 수 밖에 없는, 그 어둡고 긴 터널을 오직 영웅을 형상화하겠다는 일념, 불굴의 의지로 그려나갔다. 다소 무겁고도 어두운 이 음악은 인생의 ‘비애와 고독’, ‘공포와 절망’, ‘용기와 투쟁’… ‘환희와 승리’ 등 모든 것이 담겨 져 있는 데 위대한 문학작품이 그렇듯 결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베토벤은 ‘내 음악을 이해하는 자는 다른 사람이 진 비참한 짐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이다”고 공언한 바 있는 데, 바로 ‘영웅(교향곡)’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웅과 범인의 차이는 반전의 힘일 것이다. 얼마 전 한국의 모 전직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전 한국이 초상집에 된 적이 있었다. 정치적 충격파가 컸고, 아직도 한국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왜일까? 적어도 그의 죽음이 반전의 죽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생을 연극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주어진 무대, 시간과 공간 안에서 멋진 연기를 하고 싶어한다. 멋지고 화려한 연극(드라마)일수록 만인의 시선을 자극하고 인기몰이를 할 수 있다. 그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화려한 연기… 영웅본색이었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고독한 선택이었을까… 같은 죽음이라도 무의미한 죽음이 있고,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있다.
‘영웅 교향곡’을 작곡하던 당시의 베토벤은 치명적인 귓병으로 절망하던 시기였다. 죽느냐 사느냐 선택의 기로에 선 그는 유서를 남기고 죽으려고 했으나 그를 살린 것은 음악에 대한 욕망이었다. 그 역시 일종의 영웅본색이었다고나할까, 위대한 음악을 남기겠다는 창조적인 욕망은 그를 죽음에서 구출했고, 일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 베토벤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 제 1탄이 ‘영웅 교향곡’이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였을까? 영웅 나폴레옹을 위해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으로 교향곡을 작곡했으나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악보를 팽개쳐 버렸다가 나중에 ‘영웅(Eroica)’이란 제목으로 개작되었다. 1805년 빈에서 초연을 본 ‘영웅교향곡’이야말로 당시까지 보여주지 못한, 강렬한 메시지가 담긴 음악이었다. 참으로 웅장한 테마… 야심 찬 구상의 명작으로 특히 마지막 폭발하는 듯한 승리의 팡파르는 반전의 극치… 말 그대로 ‘영웅’의 이미지에 걸 맞는 음악이었다.
음악이 다만 귀를 즐겁게 해 주는… 하나의 광대 짓에 불과하다면 진정한 음악이 될 수 있을까? 음악이란 바로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 폭풍우 속에서… 고독한 선택을 내릴 수 밖에 없을 때… 용기가 되어 주는 그런 음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느 영웅을 추모하면서…’로 개정된 이 작품은 결국 베토벤 자신을 위한 작품이 되었고 2악장 장송행진곡은 바로 자신의 장례식 때 연주되었다. 베토벤은 2악장을 두고 나폴레옹(영웅)의 죽음을 위해 이미 자신이 예비해 두었다고 예언처럼 말했다고 한다.
죽느냐 사느냐의 고독한 선택… 폭풍우가 몰려 올 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영웅을 위한, 아니 우리들을 위한… 베토벤이 전하는 영웅교향곡을 들어보세요.
<이정훈 기자>
jungmuse@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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