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상에 필요악이 많이 있어 종교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소위 성직자라는 계층이 있어 everybody’s Business인 종교를 독점 독식하려는 형태가 그중의 하나다. 이렇게 되면 성직자도 시장바닥의 장사치와 별반 다를것이 없게 된다. 험난한 세상을 살면서 어찌 의지할곳을 찾고 싶은 마음들이 없겠는가. 절박한 경우들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성인에 대한 귀의는 이렇게 잉태되고 이런 중생들을 성중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그리고 인도가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낭패스러운 일이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도 끊임 없이 싫어 하거나 피곤해하지 않고 행해져야 할것이다. 중간에서 그만 피차간에 일종의 가족관계처럼 변질되고 곧 애증에 빠져 청정함에 회향할길이 아득히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혹떼러 갔다가 혹붙이고 돌아오는 경우다. 젖을 떼러갔다가 유아적인 막무가내가 되어 성숙한 어른이 될길이 아득하게 멀어지게 되니 안스럽고 민망한 일이다.
절에 조금 나갔다하면 승속이 한통속이 되어 으례하는 말이 ‘아는 것 가지고 안된다’는 떼쓰는 버르장 머리다. 이것은 요절 복통할 유언비어이며 언어 폭력이며 허장성세를 부채질하는 선동으로써 한마디로 유치한 언사다. 지식과 안다는 것이 그리쉽고 우스운 일인가. 우리가 서로 걱정해주고 탁마해야 할일은 오직 ‘결정적인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래의 진실한 뜻을 알아 차리는 것이 바로 결정적인 이해인 것이고 도통하는 일이다.
깨달음은 지각과 촉각을 극대화해서 도달하는 것인데 이것의 기초가 되는 앎과 지식을 잘라버린 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결과는 아는 것도 없어 무지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막지가 되어 결국 무지막지한 불교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 불교의 현주소는 ‘무지막지한 불교’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교설은 한마디 한글자도 흐리멍텅하거나 허튼것이 없다. 마땅히 알려고 하고 이해할려고 하고 밝힐려고 해야 할일이다. 이것이 믿는 마음 신심이다. 장차 불보살의 가피하심이 쏟아져 나올 인연이 되는 곳이다. 가피를 입고 있다는 마음 없이 신심이 있다고는 할수가 없는 것이다. 연습하지 않아도 저절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줄을 데는 곳이다. 만사형통이 이루어지는 신행인 것이다. 이 마음이 되지 않고 고맙다 감사하다 주절거리는 것은 열등한 인간의 한풀이에 불과한것이다.
‘ 결정적인 이해’가 되지 않고 따라서 만사형통의 가피하심을 입지 못하는 것은 단한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업장으로 이룩된 팔자소관 때문이다. 업장과 팔자의 관리하는바 소관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순화 할수는 있는 것이 인간이다. 소위 말하는 ‘수행한다’는 것은 업장과 팔자의 소관을 순화하는것 이외의 것이 아니다. 비가 오는 것을 어찌 할수는 없지만 우산을 쓸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지혜다.
지식을 통해서 지각이 생기고 지각이 증장하여 즉 increase되고 enlarge 되면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느낌을 통해서 촉각이 생기고 촉각이 증장하여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것이 또한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지식과 느낌을 기초로해서 지각과 촉각을 형성하고 증장해서 ‘결정적인 이해’를 해서 마친다는 것이 불교라는 것이다.
저 피안에 도달한다는 도피안은 ‘선지식’을 만나는 것을 말한다. 선지식이 있는 곳이 피안이다. 예언이 약속된 땅이다. 꿀과 젖이 넘쳐흐르는 곳이 결코 피안은 아닌것이다. 결정적인 이해가 많이 성취된이를 우리는 ‘선지식’이라고 한다. 선지식은 대단한 지식인이다. 등불을 전하는 (전등) 불가사의한 정도의 지식인인 것이다. 수행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신,해,행,증도 그 골자는 解(해) 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보살대행도 解로 나아가는 일이며 증오도 解에 이르는 길이다. 믿음도 解를 거룩하게 일에 불과 한것이다. 지식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육성을 가장 진실하게 담았다는 저 근본불교의 십이 인연과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등에 대해서는 달달달달 외워서 영겁에도 잊지 않는 지식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 위빠사나와 명상을 통해서 근본 가르침을 씹어 삼켜야 한다. 또 한 보살대행의 대승불교를 달달달달 익히고 씹어 삼켜서 결정적인 대승을 이해하여 대자대비를 느껴봐야 한다.
조사와 선지식의 어록을 달달달달 외우고 이해해서 부처님의 광대 무변한 위대함을 만천하에 증거해야 한다. 주문을 외운다고, 참선을 한다고, 독경을 한다고,기도를 한다고 이야기 하지 말라,이것들은 다 해보는 것이고 우리가 진실로 말해야 하는것은 ‘결정적인 이해’에 대한 토로가 있을 뿐인 것이다. 부처와 조사와 선지식들은 言과 語와 文을 폐지하자고 주장한 어문폐지 운동가 출신들이 아니다. 인류최고의 지성인인 선지식이 되어 言과 語와 文을 다시 이르켜 세운분들이다. 들과 산과 인간과 하늘과 짐승을 바로 드러내 보인 어문학자인 것이다.
“늘상 나불거리는 道를 가지고 道라하지 말라. 늘상 불러온 이름으로 이름을 삼지말라”고 노자어른도 일갈하지 않으셨든가. 마땅히 알고 있는것(常道와 常名)을 빛낼지어다. 지식을 빛낼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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