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게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 아름다운 문장으로 삶의 경이로움과 희망을 노래했던 수필가 장영희 교수님이 지난 5월 9일 세상을 떠나셨다. 신체장애와 여러 차례의 암 투병이라는 생의 질곡들과 고통에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히 강의와 번역을 하며 글을 쓰셨던 그 분의 열정과 삶의 의지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장영희 교수님을 생각하면 아주 높은 산에서 자라는 나무가 늘 떠오르고는 한다. 높은 고도에서 극심한 추위와 비바람을 이겨내느라 키는 자라지 못하고 가지는 휘어졌지만, 기나긴 인고의 세월 추위와 더위를 이겨내며 더 단단해지고 강해진 나무로 만들어진 바이올린은 이 세상에서 가장 청아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하니 말이다.
엘리베이터 없는 5층짜리 인문관 건물의 많은 계단을 두꺼운 전공서적이 담긴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계단 하나 하나를 필사적으로 걸어 오르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나의 눈에 선하다.
장영희 교수님은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보다도 밝고 따뜻하고 유머가 넘치던 분이셨다. 그리고 제자들의 사소한 부탁도 거절하지 않고 도움을 줄 정도로 제자사랑이 각별했기에, 선생님의 작은 사무실은 스스럼없이 찾아간 학생들로 늘 북적거렸었다.
학창시절, 전공과목의 쪽지 시험을 치기로 되어있던 내 생일날, 오늘 생일인데 공부를 못했으니 시험 연기해 달라며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장난삼아 남긴 나의 작은 메모에 시험을 다른 날로 연기해 주던 분이었고, 미국으로 오기 전 남편과 함께 인사드리러 갔던 날, 맛있는 점심을 사주고 결혼선물이라며 학교 체육복을 건네주던 선생님이셨다.
한국에 갈 때마다 찾아뵈면 이십년 전 그 모습 그대로 반겨주어 나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고는 했었다. 선생님은 어쩌면 그렇게 늙지도 않고 옛날하고 똑 같냐고, 저만 늙었다고 한탄하는 나에게 “그래? 어떤 남학생은 자기는 대머리가 되어 찾아와서는 나한테 왜 이렇게 늙었냐고 그러지뭐니. “ 하며 소녀처럼 좋아하면서 환하게 웃으셨었다. 제자인 내가 글을 쓰는 것을 무척 기뻐하면서, 학창시절 친했던 시를 쓰던 남학생의 소식을 궁금해하자 수소문해서 사흘만에 찾아주던 분이셨다.
언제인가 내가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지냈던 겨울, 손이 자유롭지 못하니 아이 손을 잡을 수도, 닫힌 문을 열 수도, 비가 와도 우산을 쓸 수도 없던 그 한달동안, 나는 선생님 생각을 많이 했었다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에서 청바지에 허름한 티셔츠 입고 명동시내에 나갔다가 걸인으로 오인받은 이후,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학생들 체면 때문에라도 불편한 정장을 늘 차려입고 다닌다던 선생님, 비록 육체적인 장애가 있지만 나도 이 세상에서 밥벌이 할 수 있으니 한번 끼게 해 달라고, 잘 할 테니 한번이라도 기회를 달라 했던 그 분의 삶은 눈물겹도록 치열한 삶이었다. 그리고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문학은 인간이 고난과 역경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냈는가를 가르친다던 말씀대로, 나도 글의 힘, 문학의 힘을 믿는다.
장영희 선생님의 죽음이 너무 안타깝다. 57세의 젊은 나이가 안타깝고, 많은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희망을 주던 그 분의 훌륭한 인품과 인간미, 문학적 재능이 아깝다.
그리고 선생님의 어머님께 남겼다는 마지막 글은 나를 울린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다 나중에 다시 만나.’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이별의 슬픔을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을까? 무거운 목발 없이도 자유로운 천국에서 지금쯤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님을 다시 만나셨을까? 나뭇잎과 풀잎에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나 눈 부시게 아름다운 초여름, 나는 이 세상 인연의 끈 하나를 또 이렇게 허무하게 놓치며 선생님을 떠나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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