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극도로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눈물을 흘린다. 마치 얼음이 어는 빙점의 순간처럼 사람은 감정을 제어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순간에 누구나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다. 인간의 피조물적인, 나약한 모습을 고백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눈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기뻐서 흘리는 눈물, 슬퍼서 흘리는 눈물, 감동의 눈물, 회한의 눈물…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성경 잠언서에 보면 ‘잔치집 보다는 장례식을 사모’하라는 구절이 있다. 눈물에는 카타르시스적인 요소가 있어서 사람은 눈물의 고통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또 영혼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극도의 슬픔, 기쁨의 순간보다는 무미건조한 날들이 많기 마련이다.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절규의 대상이 없다. 그날이 그날인 매일의 삶 속에는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페이소스(비애)를 자극 받기 힘들다. 생의 빙점, 그 얼어붙는 순간에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 반 고호와 같은 예술가들의 생애는 죽음보다 지루한… 절망의 연속선에 서있는 우리의 모습을 연상시키곤 한다. 사람들이 시를 짓고, 연극을 하고, 음악을 만들고 예술에 심취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무미건조한 삶에서 탈출, 인위적인 페이소스를 구하기 위함일 것이다.
가끔 잠 못 이루는 날이면 불꽃처럼 살다 간 불세출의 소프라노 마라아 칼라스의 노래를 듣곤 한다. 그 어둡고 거친 목소리, 배신으로 얼룩진 모난 인생… 극적으로 치닫던 사랑과 죽음… 그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남편(매니저였던 매네기니)을 배신하고 선박왕(오나시스)과 염문을 뿌리고 또 배신으로 치를 떨다 운명에 복수 당한 한 여자의 일생… 그녀의 목소리가 남 달랐던 것은 아마 그녀에게는 보통 여인에겐 없는, 어딘가 남다른 야망과 도전의식, 또 절망을 예견했던 운명의식이 내재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칼라스는 평소 기피하던 가수 중의 하나이곤 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그녀의 굴곡 심한 삶, 모난 인생역정… 센세이셔널니즘으로 얼룩진 방종이 싫어서였다. 그러나 밋밋한 삶의 역정 속에서 또 그녀가 아니면 눈물 나게 아름다운 아리아를 느껴 볼 수 없다는 것이 생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니체는 음악을 모르는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아마도 마리아 칼라스를 모르고는 오페라를 논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BC, AC(Before Callas, After Callas)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칼라스의 목소리는 어쩐지 사자의 머리칼을 연상케 한다. 황금빛 노을 같은 폭넓은 목소리… 그러나 어딘지 거칠고도 사납다. 그녀의 목소리를 세기의 목소리라 칭하는 데는 그 사자와 같은 사나움과 카리스마 때문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특이하다. 아름답고 우아한 목소리의 대명사, 동시대의 라이벌이었던 레나타 테발디는 칼라스와 같은 목소리가 승승장구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모나고 쇳소리에 가까운 거친 목소리가 스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남편 메네기니의 도움 때문이었다. 칼라스는 24세 때 베니스에 노래를 부르러 갔다가 당시 사업가였던 28세 연상의 매네기니를 만난다.
이 때 그녀는 매우 뚱뚱하고 기형적인 다리를 하고 있었으나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매네기니의 적극적인 후원과 관리 덕분에 ‘라 지오콘다’ 데뷰공연에서 선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매네기니는 특이한 목소리의 칼라스를 스타로 만들고 싶어했고 그녀의 거만한 성품, 스타의식 등은 모두 매네기니의 창작품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 칼라스는 탄탄대로를 걸었고 1950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불세출의 프리 마돈나로서 세계 오페라계를 평정했다. 그러나 10년 후 선반왕 오나시스를 만난 칼라스는 그처럼 헌신했던 남편을 헌식짝처럼 버리고 매네기니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떠나간다. 메네기니는 그 때의 상처로 칼라스가 절망 속에서 죽을 때까지 결코 그녀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칼라스는 ‘춘희’, ‘노르마’, ‘오델로’ 등 칼라스 아니면 그 누구도 들려 줄 수 없는 명반을 수없이 남겼지만 아마도 칼라스하면 대명사처럼 떠오르는 작품이 데뷰작 ‘라 지오콘다’가 아닐까 한다.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지오콘다’는 거리의 여인(가수) 지오콘다의 비극을 그린 작품으로 선원 엔쪼, 라우리와의 삼각관계 속에서 결국 지오콘다의 자살로 끝을 맺는다는 비극이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과 닮은 이 작품에서 칼라스는 야외 무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죽여주게 잘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4막의 ‘자살 아리아’, 그리고 1막의 마지막 장면, 눈먼 어머니와 함께 부르는 ‘어머니 왜 나를 나셨나요’의 절규는 칼라스의 인생역정과 교차되어, 그녀 아니면 들려 줄 수 없는 감동과 눈물로, 영원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 끔찍한 순간에/ 내게 남은 건 그대뿐/ 그대만이 내 마음을 유혹한다/ 그것은 내 운명의 마지막 부름/ 인생의 노상에서 마지막 건너야 할 길…
오늘 밤에도 무의미한 별빛만이 창밖에 가득합니까? 칼라스가 부르는 지오콘다의 절규를 전축에 한번 걸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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