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내건 담력시합에 유일하게 응했다. 시합 장소는 수백 개의 시체가 군데군데 묻혀 있던 산 속의 묘지였다. 새벽 2시가 되자 증인 될 친구 하나가 따라붙고 홀로 무덤을 향했다. 묘 이장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기에 봉긋하게 솟은 무덤들과는 달리 푹 파인 무덤의 시커먼 공간들이 섬뜩함을 자아냈다. 나는 시체가 뉘였던 관, 이제는 다 썩어 나무 파편들만이 흐트러진 그 관에 시체처럼 누웠다.
잠시였지만 썩은 관 속에 누워서 죽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내 무덤 앞에 세워질 비석엔 무엇이라 새겨질 것인가? 매우 궁금해 했다. 그 날 이후로 죽음은 삶 이상으로 내 존재에 깊이 뿌리를 박고 친밀함을 유지해오고 있다.
비문을 미리 만들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얼마 전에는 유언장 작성하기가 유행처럼 지나가기도 했다. 진지한 마음으로 유언을 작성해보는 것도 좋은 일이며, 비석에 새길 글귀를 세심히 다듬어보는 것도 귀한 일이다. 비문을 스스로 작성하면 자신의 남은 삶에 보다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비문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하는 염원이 싹튼다. 영광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최선의 삶을 추구하게끔 한다. 죽음을 두렵고 혐오스런 것으로 보면 비문작성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바울은 사망을 원수로 간주했다. 그가 정죄한 것은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과 죽음의 파괴적인 성격이었다. 성 프랜시스는 생명을 형제로 받아들이듯이 죽음을 자매로 받아들였다.
죽음과의 동행이 없다면 영원한 삶으로의 진입은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듯 그렇게 애틋한 마음으로 죽음에게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죽음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다. 죽음은 내 삶의 마지막 순간과 영원의 문턱을 이어주는 브리지다. 죽음은 일생에 한번 내 곁에 다가오는 외로운 친구다. 외로운 친구의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을 환영해야 한다. 그를 외롭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의 비문 작성이다. 비문은 오래도록 나의 지난 삶을 후세들에게 전해줄 것이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묘지를 찾을 때 나를 가장 잘 기억나게 해 줄 그 글들은 내가 세상에 남길 삶의 종지부이며 사랑의 선언이다. 찬란하지는 않지만 빛을 잃지 않고 위대하지는 못해도 위엄을 갖춘 한 인간의 비망록이 될 것이다.
오늘은 왠지 옛 그리운 산마루에 올라 별을 헤며 꿈을 속삭이던 동심으로 돌아가고픈 날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가벼운 저녁을 끝내고 바람이 그다지 차지 않다면 어둠이 깊어지기 전에 산책로를 걸으며 발자국도 세어보고 싶다. 하늘이 별의 자태를 숨기지만 않는다면 그 옛날의 내 별자리를 찾아 지난 꿈을 회상하련다. 어두운 밤이 소리도 없이 세상을 뒤덮어오듯 그렇게 나의 외로운 친구요 누이요 자매인 죽음은 내 마지막 호흡을 거두고자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다. 마지막 호흡을 접은 내 허망한 육체가 관속에 누이고 땅속에 묻히면 외롭게 서 있을 비석 하나, 내가 남길 유일한 흔적일 텐데..... 내가 읽지도 듣지도 못할 그 비문의 내용을 하늘에서나 엿볼 수 있을지. 이 밤에는 만족할만한 비문이 떠오를 것인지, 잠시 숨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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