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일은 도산 선생이 서거하신지 72주년이 되는 날이다. 추적거리며 내리는 봄비로 기온이 내려간다. 요즘 주변 환경은 체감온도를 더욱 떨어뜨린다. 도산선생의 서거일을 맞아 사람의 발길도 오가기도 힘든 망우리 산꼭대기 비탈진 곳, 두터운 석회석 관속에 내다 버려졌던 선생의 시신을 떠올린다.
목인(일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 이 한마디를 남기고 보는 이도 없이 도산선생은 돌아가셨다. 장례는 삼엄한 경계 속에서 염도 없이, 애도의 곡도 없이 치러졌다. 1973년 도산 선생의 탄신일(11월8일)을 기해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지금의 도산공원으로 이장해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합장했다. 그 날은 뒤늦게 통곡이라도 하듯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마지막 운명과 함께 토해낸 말씀으로 보아 도산 선생은 세계 평화주의자이셨다. 평소에도 “나라가 망한 것은 이완용 때문도, 일본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속의 거짓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도산 선생의 독립운동 목표는 이씨 왕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같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19세기 말 인류의 개화기를 맞아 신교육을 가르치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고, 경제적인 산업을 일으키고, 진정한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한 인재를 양성했다.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조직력으로 인적·물적, 그리고 신용의 3대 자본, 즉 ‘민족의 힘’을 축적하도록 가르쳤다.
신뢰받는 한국인이 되도록 솔선수범했고, 하와이 사탕수수밭 농장의 계약기간이 끝난 후 본토로 건너온 동포들에게 삶의 진로를 보여줬다. 리버사이드 농장에서 일을 할 때는 “귤 하나를 따더라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라고 가르쳤다. 비록 하루 품삯에서 출발했지만, 기업형 농업으로 발전시켰다. 그것이 해외 독립운동의 윤활유가 되었고, 결국 조국의 독립을 쟁취 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맞을 때마다 “이 시대에 도산 선생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실까”를 생각하게 한다. 여전히 개인과 민족의 힘을 기르라고 당부하실 것이다. 연희전문 의과를 졸업한 이용설군이 상해로 찾아와 “지금부터 무엇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도산선생은 “자신의 분야에 최고가 되는 것이다. 이비인후과 의사로서 일본 의사를 능가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 독립운동의 길”이라고 가르치셨다. 최근 한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한인 총장이 탄생했다. 이것이 바로 도산 선생이 바라던 것이다. 각자 각자가 크고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사회에서 꼭 필요한 훌륭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요즘 재외 한인들에 대한 참정권 부여로 한인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정치성향이 짙은 한인들로서는 반가운 일일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고국의 발전에 해외 한인들의 노하우를 수용하고 이들의 여론을 반영하려는 발상은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한인사회의 분열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우리 한인들의 힘이 성장하고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 조국을 위하는 길이다. 그것이 도산 선생의 가르침이다. 도산 선생 서거일을 맞아 선생의 민족경영 목표와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이창수
흥사단 미주위원부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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