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25년 넘게 잊고 있던 한국의 친구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통 소식이 없던 터라 죽었나 했는데 녀석의 연락을 받고 비로소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경상도가 고향인 친구는 2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뚝뚝했고, 보내온 이메일도 달랑 몇 자가 전부였다.
- 어제 너 연락받고 어찌나 반갑든지… 살면서 잃어버린 무엇을 찾은 느낌이 들더라고. 아침에 출근해서 너에게 메일을 쓰고 있어… 밖에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기분이 좋네… 나는 이곳(안산)에서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어. 직장은 농협중앙회에 근무. 요즘 같아선 언제 짤릴지 바늘방석… 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아 저 위에 계신 분이 어련히 알아서 해주시겠지 뭐. 너가 보고 싶네, 너희 가족들… 앞으로 자주 연락하자. 사진도 보내고. 또 연락 할께… -
편지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 녀석은 교회에 무척 열심인 친구였다. 그것이 곧 신앙심을 뜻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친구와 나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고 많은 추억을 공유했었다. 관악산 기슭, 언덕 위의 작은 교회였다. 봄이면 뒷동산에 진달래가 만발하였고 겨울이면 새하얀 눈 속에 파묻히는, 마치 카드 속에나 나오는 그런 교회였다. 친구는 문학과 팝송에 심취했고, 나는 클래식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친구는 존 덴버를 좋아했는데 생김새도 마치 존 덴버처럼 두터운 안경에 얼굴은 죽은 깨 투성이었다. 녀석과 나는 많은 부분 서로가 달랐고, 의견대립이 있었지만 또 그것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친구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를 위해 기꺼이 고전 음악 감상실을 따라가 주었고, 교회에서 음악감상회를 함께 주최하곤 했다.
가난했던 우리는 당시 전축이 있던 안양 천 너머 K선생 집으로 음악 감상을 하러 다녔다. 판이라야 흔하던 베토벤의 명곡이나 유명 아리아 ‘그대의 찬손’, ‘타이스의 명상곡’, ‘솔베이크의 노래’ 등이 전부였지만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음악에 빠져들었고, 그러다보면 밖은 어느덧 황혼으로 붉게 물든 곤 했다.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다 보면 안양 뚝 주위에는 공장에서 몰려나온 공돌이 공순이들이 껌을 쩍쩍 씹거나, 나팔 바지를 흔들면서 데이트를 즐기는 풍경이 목격되곤 했다. 가난. 그것은 그 당시 청소년들의 현주소였다.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학문에 매달렸던 학돌이들도 결국은 지식의 껍데기나마 습득, 대학에 진학하여 가난을 이겨보겠다는 절망스런 몸짓에 불과했었다. 그 당시의 청소년들은 독재, 부조리에 순응하고 돈에 굴복해야만 했다. 학생이었던 공돌이었던 불행했던 시대였다.
당시 다니던 교회의 성직자는 40대의 나이에 순직, 3명의 자녀가 졸지에 가장을 잃어야 했고, 학생회의 한 어여쁜 여학생은 암으로 고생하다 그 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죽었다. 음산했던 겨울이었지만 우리는 교회에서 만든 카드를 팔며 순수했던 마지막 젊음을 하얗게 보내려 안간힘을 다했다. 당시 불우이웃을 돕는다며 종로, 청계천 등에서 카드를 팔다 보면 마음씨 좋은 아저씨들이 5백원짜리를 던져주기도 하고, 거리에서는 ‘아베마리아’, ‘북치는 소년’ 등 캐롤 송이 들려오곤 했다.
- 아베마리아, 우리에게 새하얀 평화를, 안식을 주시옵소서, 아베마리아… -
돌이켜보면 무척이도 긴 절망의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 그토록 절망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도 인생에 대한 희망이, 그 무언가 아름다운 것이 펼쳐지리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 인생은 별 것 아닌 그저 그렇고 그랬던 것 같다. ‘솔베이크의 노래’처럼 어떤 간절한 기다림도, ‘미미’처럼 슬픈 사랑도 없이 그저 그렇게 희극적이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은 암담한 삶 속에서 다만 젊은 날에 듣던 ‘솔베이크의 노래’, ‘아베마리아’의 추억 ‘만이 문득문득 지나가는 세월을 안타깝게 붙들곤 할 뿐이다.
눈 내리는 오솔길을 함께 걷던… 옛 친구를 생각하며 ‘아메마리아’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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