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의 ‘아’자를 ‘어’자로 바꾸어 발음하면 선(禪)자가 된다. 그러므로 산(山)은 곧 선(禪)이다. 최근에 산중불교라는 비불교적 불교용어가 생겨나기도 했지만 원래가 불교는 산에 있다. 부처님의 사례를 들어 반론하는 이도 있겠지만 부처님은 차라리 <숲의 사람>이셨다.
한국에는 들판에 숲이 없는 나라다. 기껏해야 경주의 계림이나 함양의 상림숲, 거창의 아림 등 작은 숲이 산재한 형태이지만 그나마도 고목이 되고 해충의 훼손이 많아 거의 다 허물어진 형편이다. 독일에는 조림에 의한 들판의 숲이 장엄하다. 숲이 산에 있지 않고 왜 들판에 나앉아 있느냐는 여행자의 질문에 관리인은 점잖게 타일렀다. 들판은 원래 숲의 본 근거지였으나 사람들에게 밀리고 밀리다가 산 속에 은거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뿐이겠는가. 숲을 밀어낸 들판은 거의 전부가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철갑을 두른 땅으로 변했다. 들판마저 다 먹혀들었다. 소읍(小邑)마다 있어왔던 한들(큰들)이 거의 바닥이 났다. 한국의 고향을 찾을 때마다 속이 타는 심정이다. 언젠가는 사람들을 산으로 쫓고 들판과 숲을 되찾아야 할 시절이 올지도 모른다.
불교가 기독교와 다른 점이 여러 측면에서 이야기될 수가 있겠지만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인데 비해 불교는 수행의 종교라는 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말씀은 그냥 이런저런 말들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어떤 해설이나 진술 같은 것도 아닌 신의 자기계시라는 것이다.
누가 있어 이 하느님의 자기계시를 알았겠는가. 오직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나오셔서 그의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재선포되신 것이다. 예수님이 가신 뒤에는 교회가 전면에 나서서 교회만이 예수님의 몸 된 곳이라 하여 일체의 다른 길을 용납하지 않는 교회주의의 기독교가 된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급기야 교회는 종교정부를 지향하고 그 행정과 조직은 세속정부를 능가하는 수준으로 나아간 적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수도주의를 완전히 밀어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 이후 종교정부를 반대해 종교개혁을 가져온 신교운동이 성공했지만 교회중심주의와 돈(재정)의 중요성은 고스란히 이어받았다고 할 것이다. 조직과 돈은 종교가 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수적인 것이었지만 그 사회적 기능이 국가와 사회단체로 거의 다 넘어온 지금에 와서는 또 어떤 역동적인 형태로 진행될 지는 아직 그 윤곽이 뚜렷하지는 않다.
이와는 달리 불교는 수행(닦음)이 처음 있었고 깨달음과 따르는 무리는 나중의 일이기 때문에 수행이 중심이 되는 종교형태를 역사해 온 것이다. 모든 일은 수행으로 결론지어져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대의다. 정치행위도 수행이고 가정생활도 수행이다. 독경도 수행이어야 하고 기도와 선과 염불도 수행이어야 한다. 그 삶이 어떤 것이든 생의 방식(Way of Life)이 어떤 것이든 하여튼 간에 <수행이었느냐>고 묻는 것이 불교다. 하여지간에 수행이다. 그렇다면 수행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될 것이란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화두는 이것이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화두란 답이 갖추어져 있는 시험문제 같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삶의 지혜는 대신 닦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스님이 고불(古佛)인 조주 스님께 물었다. 선의 근본요지는 무엇입니까. 조주 선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 오줌 좀 눠야겠네. 이런 사소한 일 조차도 나 자신이 몸소 해야하는데 무엇을 일러줄 수 있다는 겐가> 그렇다 하더라도 통 빈손으로야 장사를 시작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시시각각으로 진행되는 삶에서 어쨌거나 <향상(向上)의 길>을 잡는 것이 수행이다. 그리고 이 <향상(向上)>의 끝을 본 것이 부처님이다 하는 두 가지는 분명하다.
부처님께 묻고(독경) 등불을 전한 이들의 언행을 챙겨보고 그리고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 수행 아니겠는가? 우리의 생(生)이 마침내 종점에 도달하여 재가 될 때까지 우리의 건강은 향상일로(向上一路)여야 하며 이, 쇠, 훼, 여, 칭, 기, 고, 락의 팔풍(八風)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정신에도 향상일로에 있어야 하며 원시시대의 맹수의 위협보다 더 무서운 사회적 변화에서도 향상일로에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이런 잡다한 것들에 균형을 잡아주는 <도(道)>에 향상일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겨울이 되면 산(山)이 더욱 그립다. 산도 나도 전신을 드러내놓고 같이 덜덜 떨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곳에는 산사山寺가 있지 않는가. 산사에는 수행자가 있다. 삼보(三寶)에서 승보(僧寶)는 수행자를 일컫는다. 삶 그 자체를 수행 하나에만 헌신한 보배로운 존재들 아닌가.
불교의 포교나 교화사업의 내용은 전적으로 수행의 일반화(Generalization)에 있다. 생활 그 자체가 수행의 장소라는 입지없이 불국토는 없다. 샘물과 같은 산중불교는 우리의 그리움이 온통 귀의하는 그런 것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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