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 신자들은 최소한 일 년에 두 번,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때에 고해를 한다. 판공이라고 하는데 전 신자들의 고해를 들어주느라 신부님들이 가장 바빠지는 시기이다. 지난 주, 고해를 들어주신 후 미사를 올리는데 강론말씀이 용서에 대한 것이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고해내용이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이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성경말씀에는 일곱 번의 칠십 배라도 용서를 해야 한다지만 실상 용서라는 게 그리 말같이 쉽지 않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로는 용서해야 한다고 자신을 몰아대도 상처가 아직도 벌겋게 욱신거릴 때 용서란 도저히 할 수 없을 뿐더러 결코 가능치 않은 일로 느껴지는데, 한편으론 용서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 모든 죄의 시작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는 상처에서 시작 된다. 그리고 상처를 치유하는 ‘용서’라는 불가능한 과제에 대한 강론의 결론은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용서가 주님의 은총 안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살면서 누군가를 미워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살면서 누구에게 배신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누군가를 향해 질투와 시기심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그리고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뒤 끝에 끈끈하게 달라붙는 죄의식과 분노의 쓰디쓴 뒷맛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렇게 모든 죄의 근원인 인간관계는, 그러나 모든 행복의 원천이기도 하다. 911사태가 벌어졌을 때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식구들에게 전화하며 마지막 남긴 말들은 전부 사랑한다는 말뿐이었다. 죽음 앞에서는 부자가 못되었던 것에 대한 실망도, 출세를 못해본 쓰라림도, 폼나게 살아보지 못한 애석함도 없다. 죽음을 목전에 둔 모든 사람의 아쉬움은 오로지 더 사랑하지 못했음을, 더 나누지 못했음을, 더 일찍 용서하지 못했음에 대한 안타까움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일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철저히 외면하며 살고 있다. 그 절대 절명한 사실을 매순간 자각하며 사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한해를 보내며 지난해에 내게 힘이 되어주었던 이웃들을 떠올려본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 마지막까지 남아 우리의 마음을 조용히 두드리며 어루만지던 희망이라는 이름의 얼굴로 내게 다가와 추운 맘을 녹여주었던 이웃들. 나의 상처를 마치 자신의 아픔인양 보듬어준 이웃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것으로 내게 기쁨과 보람을 주었던 두 아이들. 또 이 험한 세상에 태어나 그 힘겨움 속에서도 웃음을 자아내게 해 주위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작은 생명. 그 철저한 무력함만을 갖고 사람의 맘을 따스하게 하는 아기의 신비한 생명력. 정말 모두 모두 너무나 고맙다.
아직도 나는 내게 아픔을 준 사람들에게도 감히 ‘용서’라는 말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은총 안에서 모든 상처가 아물어 건강한 에너지를 주위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열망만은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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