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과 글의 힘 / 윤선중 교무(원불교 SF 교당)
새 학기가 시작되는 9월이 되면 생각나는 두 사람이 있다. 바로 헬렌켈러와 『무기가 되는 글자와 말』의 저자 다카노 마사오이다. 내가 존경하는 이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에게 사물을 인식하고, 그 사물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가를 알려준 분이라는 것이다.
헬렌켈러와 다카노 마사오는 말과 글을 보통사람들처럼 학교가 들어갈 나이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배우지 못했다. 헬렌켈러는 어릴 때 앓은 열병으로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은 장애 때문에 그랬고, 마사오씨는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나 전쟁 중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어 전쟁고아가 되어 배움의 기회를 전혀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에게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상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창문을 열게 해 준 스승이 있었다. 헬렌켈러에게는 애니 설리번 선생님이 다카오 마사오씨에게는 일본에서 만난 조선인 넝마주이 할아버지(그의 책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음)가.
헬렌켈러의 자서전 『The Story of My Life』에서 그녀는 ‘내 생애의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설리번 선생님이 자신에게 온 날’이라고 기록하고, 다카노 마사오씨는 ‘리어카를 끌고 열심히 일을 하고 폐품 속에서 찾아낸 그림 카드로 할아버지에게 “다카노마사오”라는 이름을 처음 배웠을 때, 나의 생애에 있어서 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순간’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다짐한다. ‘이 하느님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이 하느님에게 보은하면서 살아가겠다고.’ 그리고 평생을 배울 권리를 누리지 못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야간학교를 운영하면서 살고 있다.
이 두 사람을 떠올리면, ‘과연 나는 얼마나 생명이 깃든 말과 글을 쓰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헬렌켈러가 어두운 동굴에서 언어를 인지하면서부터 새로운 빛의 세상을 발견하게 된 것처럼, 마사오씨가 자신의 이름 여섯 자를 알게 되면서 느낀 그 희열과 기쁨처럼. 나는 얼마나 감사로 경이로 이 말과 글을 쓰고 있는가.
다카노 마사오씨가 글자와 말이 마음의 공기라고 회고 했을 때, 나에게는 그동안 글자와 말이 욕심의 공기가 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10년 전, 인도에서 여행을 할 때, 외국인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은 나를 대상으로 삼지 못했다. 내가 그들의 말을 할 줄 알고 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때 나는 내심 안다는 것의 힘을 자랑처럼 간직하면서 그렇게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내가 진작 다카노 마사오를 알았더라면, ‘내가 배운 글자와 말로, 거리에서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그들만의 하느님을 만나게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전하면서 정말 세상은 살만하구나 하는 것을 느끼도록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요즘 한국에서는 갈수록 영어 교육이 중요해 지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말과 글에는 분명 무한한 힘이 있다. 그런데 이것을 배우기 전에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말과 글을 무엇 때문에 배우고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철학을 확립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말과 글을 배운다는 자체가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일인가를 깨닫고 말과 글을 쓸 때 원망과 질투와 욕심보다는 감사와 경이와 그리고 평화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쓸 것을 다짐하는 일이라 생각된다.
훈민정음 모음의 < . ㅡ ㅣ> 세 기본자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조합해서 글을 쓰는 우리는, 글을 쓸 때마다 어쩌면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 되는 염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평화의 글자를 사용하면서, 때로는 남을 비난하고, 왜곡된 말과 글을 쓰는 일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으로서 언어를 처음 인식하게 된 역사적 순간을 마음 속 깊이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순간 순간 내가 쓰고 있는 말과 글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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