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27일 미 동부시간으로 저녁 6시 45분 경 우리는 하나의 역사적인 순간을 경험했다. 비록 많은 사람들에게 TV를 통한 간접 경험이긴 했지만 그 역사적 장면이 벌어지는 순간을 우리 눈으로 지켜 볼 수 있었다.
콜로라도 주의 덴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오는 11월에 있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대표로 누구를 내 보낼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대의원들이 어느 후보에게 투표할 것인지 결정하는 주별 호명투표(roll call)가 버락 오바마의 출신 주인 일리노이를 거쳐 뉴욕에 이르렀을 때였다.
예비선거 과정에서 오바마 후보와 미국 대통령선거 사상 유례 없이 길고도 치열한 접전을 펼쳤던 힐러리 클린튼이 전당대회 의장에게 동의(動議)를 제기했다. 주별 호명투표를 당장 중단하고 당원 전체가 하나가 되어 환호와 박수로 버락 오바마를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결정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의장은 이 동의에 대한 재청(再請)이 있는지 물었고 장내에 모인 민주당원들은 한 목소리로 커다랗게 재청한다고 외쳤다. 이에 의장은 “동의한 대로 버락 오바마를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하는데 찬성하는 사람은 ‘예’라고 하시오”라고 요청했고 사람들은 다시 장내가 떠나가도록 ‘예’라고 대답했다.
232년 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이 주요 정당의 대통령후보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일이 232년 미국 역사상 처음이라는 말을 하지만 사실 이 땅에 처음 흑인들이 노예로 붙들려 왔을 때를 헤아린다면 훨씬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컬럼버스가 미대륙에 당도한 이래 서구의 여러 나라들이 앞 다투어 이곳으로 몰려와서 식민지를 개척할 즈음, 그러니까 16세기부터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미 대륙으로 실려 왔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흑인노예가 ‘미국’에 들어온 것은 1619년 네덜란드 선박이 흑인 노예를 태우고 멕시코로 향하던 스페인 선박으로부터 20명의 흑인을 빼앗아 동부의 초기 정착지로 데리고 온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물론 미국이 건국되기 전의 일이지만. 그 이후 총 64만여 명의 흑인노예들이 미국으로 들어왔고 그들이 1863년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령과 수정헌법 13조에 의해서 민권을 인정받게 될 즈음에는 흑인노예의 인구는 400만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동안 그들이 흘린 엄청난 눈물과 피와 땀에 관한 수많은 비극적 얘기들에 대해서도 우리들은 제3자나 방관자가 되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미국역사에 무지하고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또 우리가 아무리 이런 일에 둔감하고 또 때로는 짐짓 모르는 척 하고 지나친다고 하더라도 흑인에 관한 수많은 얘기들을 보고 들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니그로, KKK, 인종차별, 로사 팍스,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말들이 우리 귀에 익고, 또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흑인은 백인과 함께 학교, 교회, 식당, 버스, 화장실도 같이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노예제와 흑백갈등이 빚은 상처는 지금도 미국의 구석구석에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지금도 흑인들만 주로 다니는 대학교나 교회가 따로 있고 흑인들만 주로 사는 동네가 따로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흑인이 아직 대통령에 당선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 오바마의 민주당 대통령후보 결정의 진정한 의미는 미국인들이 이제 그들을 다스릴 대통령 감의 하나로 흑인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인종화합에 관한 한 미국의 갈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 그러나 이번 일로 미국은 역사적으로 뜻 깊은 이정표를 찍게 되었다.
장석정
일리노이주립대학교
경영대 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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